빛과 소리가 없는 세상, 그곳에 사는 사람들

입력 2025-02-17 00:30
헬렌켈러센터에서 열린 시청각장애인 자조모임 송년회에서 윤세웅씨가 촉수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윤세웅(51)씨는 매일 아침 6시쯤 일어난다. 앞을 보지 못하는 그는 손등으로 벽을 더듬어 화장실로 향한다. 오로지 촉각에 의지해 칫솔에 치약을 짠다. 혹시 너무 많이 짠 것은 아닐까. 손으로 더듬어 칫솔에 묻은 치약의 양을 가늠한다.

양치질이 끝나면 샴푸 린스 바디워시를 찾는다. 과거엔 냄새로 구분했지만 언젠가부터 요령이 생겼다. 각기 다른 형태의 용기에 이들 제품을 넣어놓았으니까. 옷을 고를 땐 손으로 일일이 옷을 만져 이것이 운동복인지 청바지인지 파악한다. 외출 전 선글라스는 필수. 마스크와 모자를 챙긴 뒤 활동지원사가 오길 기다렸다가 함께 일터로 향한다.

윤씨는 중학생 때부터 시력이 안 좋았고 결국 2018년 시각장애 판정을 받았다. 여느 시각장애인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가 듣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윤씨는 태어날 때부터 청각장애인이었다. 그가 살아가는 세계, 그곳엔 빛과 소리가 없다.

어둠과 침묵 속에서 발견한 희망

과거 윤씨는 한 제화 회사에 다녔다. ‘불량 신발’을 찾아내는 게 그의 업무였다. 하지만 차츰 시력을 잃으면서 2017년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

윤씨는 퇴사한 뒤 한동안 숨어 지내다시피 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걸을 수도 없었다. 외출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고 뭔가에 부딪히는 일도 많았다. 다행히 5년 전 활동지원사를 구한 덕분에 윤씨는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현재 윤씨가 일하는 곳은 시청각장애인을 섬기는 단체로 밀알복지재단 산하에 있는 헬렌켈러센터다. 그가 서울 강남구에 있는 이곳에서 근무한 것은 2021년부터. 윤씨는 ‘동료 상담가’로 일하면서 시청각장애인이 촉수화(촉각을 통한 수어 통역)나 점자를 배울 수 있도록 해주고, 이들에게 점자정보단말기 사용법을 가르쳐준다. 매주 목요일엔 시청각장애인 자조 모임도 이끌고 있다.
헬렌켈러 시청각장애인학습지원센터에서 윤세웅씨가 촉수화 통역가 김주민씨의 도움으로 질문 내용을 이해하고 있다.

최근 헬렌켈러센터에서 만난 윤씨와의 인터뷰는 촉수화 통역가 김주민씨의 도움을 받아 진행됐다. 취재진이 질문하면 촉수화 전문가가 그 내용을 수어로 표현했고, 윤씨는 시시각각 달라지는 전문가의 손 모양을 만지면서 촉감을 통해 질문의 뜻을 이해했다.

윤씨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출석하던 교회에서 만난 시청각장애인 덕분에 이 기관의 존재를 알게 됐다고 한다. 그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헬렌켈러센터 때문에 시청각장애가 있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고, 누군가와 웃으면서 다시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 덕분에 희망을 찾게 됐다”고 했다.

시청각장애인의 팍팍한 삶은 현정원(72)씨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달 9일 헬렌켈러센터에서 만난 현씨가 들려준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개괄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그는 어린 시절 청각장애인이 됐고 20대 후반에 실명했다.

그의 학창시절은 녹록지 않았다. 일반 학교에 다녔는데 장애인을 향한 배려가 없었기에 힘들 때가 많았다. 현씨는 “부족한 공부량을 채우기 위해 가정교사도 고용했었다”고 말했다.

현씨는 보청기를 끼면 오른쪽 귀로 얼마쯤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상태다. 하지만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모두 겪고 있기에 불편한 게 많은 건 불문가지다. 가령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도 불편하다. 현씨는 장애인 이동지원 서비스인 복지콜이나 나비콜을 주로 이용한다. 복지콜 운전기사는 목적지에 도착한 후에도 탑승자를 정확한 목적지까지 안내해주지만 나비콜은 일반 택시를 장애인들이 바우처로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기사들이 목적지까지 안내해주지 않을 때가 많다.

현씨는 “오늘도 복지콜은 연결이 안 됐다. 다행히 활동지원사가 있어 나비콜을 이용해 센터에 왔다”고 말했다. 이어 “일반 택시는 비용이 부담돼 이용하기 어렵지만 복지콜이나 나비콜은 저렴하다”며 “아주 급한 일이거나 가까운 거리를 이동할 때만 일반택시를 이용한다”고 덧붙였다.

시청각장애인들이 '연결'될 수 있다면

윤씨처럼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동시에 감당하며 살아가는 이는 국내에만 약 1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수치는 시각장애와 청각장애에 중복으로 등록된 장애인의 수만 파악한 것이다. 정부는 시청각장애를 하나의 장애 유형으로 보지 않고 시각장애와 청각장애의 단순 중복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둘 중 하나라도 등록되어 있지 않으면 시청각장애인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장애인복지법상에 등록된 장애가 아니라는 의미다.

홍유미 헬렌켈러센터 센터장은 “센터로 연락을 주는 시청각장애인 중에 아직 청각장애인으로는 등록하지 않았다는 분이 많다”고 전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복지 서비스가 청각장애인을 위한 서비스보다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 위치한 시청각장애인의 지원을 돕는 헬렌켈러센터와 학습지원센터.

헬렌켈러센터에서는 과거 시청각장애를 하나의 장애 유형으로 정의하고 이들을 지원할 수 있는 특별법을 만들어 달라는 운동을 벌였다. 한때는 이른바 ‘헬레켈러법’ 제정을 촉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청각장애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특별법 제정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보건복지부의 의견에 부딪혀 법 제정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다행히 이런 노력은 2019년 12월 장애인복지법이 개정 및 신설되는 데 끌차 역할을 했다. 해당 법령에는 시청각장애인들이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이들은 점자정보단말기 등 보조기구를 보급하고, 의사소통 전문인력을 양성하며, 시청각장애인을 지원하기 위한 전담기관을 설치 및 운영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윤씨는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시설이나 기관이 더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내엔 숨어 있는 시청각장애인이 많다”며 “이들이 서로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 지금보다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사진=박상희 이가림 인턴기자 onlinenews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