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애 원장의 미용 에세이] 바이오 양말

입력 2025-02-13 22:29

1993년 여름 대전에서 엑스포가 열렸다. 우리나라의 우수성을 아이에게 보여 주어 정체성을 바로 알게 하고 싶어 캐나다에서 참석했다.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눈부시게 발전한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다. 아이와 함께 이틀 동안 엑스포 관광을 끝내고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오십 대 아저씨가 버스에 올라 가방을 내려놓더니 순식간에 양말 두 켤레를 꺼내 버스 행거에 매달아 놓고 육중한 몸으로 매달렸다. 그리고 양말 속에 주먹을 밀어 넣고 늘려 보이며 양말의 우수성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첫째는 무좀 방지, 둘째는 냄새 제거, 미끄럼 방지와 정전기도 차단되는 순면 양말이라고 했다. 오늘 이 양말을 다 팔지 못하면 뇌종양을 앓고 있는 아내의 치료비 감당을 못한다는 애절한 호소를 했다. 수술비를 마련해야 하는 문제로 직장도 접었다는 눈물의 호소에 우리 가족은 마음이 저렸다. 아저씨는 선배의 도움을 받아 양말 외판업으로 살아간다고 했다. 버스 안에서 몇 명의 엄마들이 안타까운 마음에 양말을 샀다. 타인의 슬픔을 그냥 흘리지 못하는 나도 여덟 켤레를 샀다.

“엄마, 저 양말 다 사면 안 될까요.” 하며 막내는 나를 바라보았다. 아빠와 형의 발도 냄새 없는 양말이 필요하다며 내 옆구리를 꾹꾹 찔렀다. 아이는 양말뿐 아니라 할 수만 있다면 아저씨의 가난과 고통까지를 몽땅 사고 싶은 눈치였다. 아빠의 표정을 살피며 지갑을 털어 그 아저씨의 양말을 한 보따리 샀다. 아저씨는 너무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동심 어린 내 아이는 아저씨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정말 좋은 양말입니다. 나중에도 연락 주세요.” 하면서 명함을 주고 아들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내렸다. 사실 고국에 나올 때마다 선물 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캐나다에서 내게 양말을 선물로 받은 이들은 두고두고 고마워했다. 여행 중에 이틀을 연거푸 신어도 냄새가 없는 요술 양말이라 했다. 참 좋은 품질이었다.

나는 그다음 해에도 서울에 왔을 때 성남에 있는 양말 공장에 그 아저씨를 찾아가 바이오 양말을 구입했다. 그 아저씨는 우리 막내를 잊지 않고 안부를 물었다.

나는 가끔 쇼핑 습관 때문에 가족들에게 핀잔받을 때도 있다. 귀가 엷다느니 고치기 어려운 병이라고 잔소리를 했다. 그때마다 내 귀가 엷어 도움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하고 웃어넘겼다. 바쁜 사람은 살아가는 스타일이 다를 수도 있다. 어느 날 동네 골목길을 지나다 리어카에서 홍합을 두 꾸러미 샀다. 그런데 그 속에서 흑진주가 일곱 개나 나왔다. 보석상에게 보였더니 큰 것들은 한 알에 9만 원 작은 건 7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늘 바쁜 걸음으로 충동구매를 했을 때도 그 사건들로 인해서 나는 늘 행복했다.

메말라 갈라진 논바닥처럼 팍팍하고 서로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삭막한 세상이다. 따뜻한 인간애를 이어 가는 것은 모두 푼돈을 아끼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지하철과 노점상, 또는 버스 안에서도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눈에 띄면 사곤 한다. 몇 차례에 한 번쯤은 쓰레기로 버려지지만 마음 아프거나 당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바이오 양말을 다시 사기 위해 성남 대리점을 찾았을 때 그 아저씨는 내게 말했다. “저 양말 장사 평생 하겠습니다.”

“그늘 속에서 고통당하는 발을 행복하게 해 주는 아저씨라고 한 어린 아드님 말을 평생 잊을 수가 없어요. 그때 뇌 수술한 아내도 완쾌되어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저에게 힘주신 그날을 자랑하고 다녔어요. 교회에서 간증도 했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인사에 세상은 혼자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대리점 주인이 되었다고 했다. 아저씨는 우리 막내아들의 안부를 물으며 따로 선물까지 챙겨 주었다. 사람들 사이에 크고 작은 나눔이 서로에게 축복으로 남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이오 양말을 어깨에 메고 최선을 다하며 살던 성실한 아저씨의 모습은 우리 아이들에게도 커다란 울림이었다.

그 가정에 경제적 자유와 행복이 찾아왔다는 소식은 우리 가족에게도 기쁨이었다. 사람 사이에도 길이 있다. 어두운 인생길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 누구나 길이 되어 줄 수 있다. 우리는 늘 먼 곳을 향해 떠난다. 그러나 가장 먼 도착지는 어디일까. 그건 바로 자신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내게는 잊히지 않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보은의 열매>
-김국애

앙증맞은 귤 오십 개와
주발만 한 단감 일곱 개
팔목 휘청하게 들고 선다

나의 열매는 무엇인가
송구함, 부끄러움뿐인데
가슴 저리는 감사

찬란히 타오르는 햇발
어루만져 물들인 열매
차오르는 과육 향
청명한 가을 하늘에 퍼지고
문풍지에 스며든 가을
뜨락에 출렁이네

계절의 고지마다 외로운 벗들
깻묵처럼 볶여 흘린 땀방울
당연한 듯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할 말은 오직 은혜였을 뿐
바구니에 넘치는 금빛 열매
벅차오르는 보은의 열매

◇김국애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W)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계간 현대수필 운영이사, 수필집 ‘길을 묻는 사람’ 저자. 이메일 gukae8589@daum.net

정리=전병선 선임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