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앞두고 고교졸업장 받은 어느 권사의 신앙 고백

입력 2025-02-11 16:55 수정 2025-02-12 18:24
배화자 권사가 11일 서울 종로구 창신동 종로구민회관에서 열린 진형중고교 제18회 졸업식에서 졸업장을 들어보이고 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평생교육시설 진형고등학교에 다니는 배화자(88·창신성결교회) 권사는 만학도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새벽예배를 드리고 난 뒤엔 왕복 세 시간에 걸친 등굣길에 올랐다. 매일 아침 관절염약을 챙겨 먹고 서둘러 경기도 남양주 집을 나서 서울 종로구 숭인동의 학교까지 다닌 게 4년이나 됐다. 여러 차례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야 했지만 늘 등굣길이 설렜다. 배 권사는 11일 중고교 과정을 모두 마치고 꿈에 그리던 졸업장을 받았다.

“학교에 빨리 오고 싶어서 힘든 줄도 모르고 다녔어요.”

이날 서울 종로구민회관에서 열린 진형중고교 제18회 졸업식에서 만난 배 권사는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배 권사는 검정색 졸업 가운이 신기한 듯 연신 이를 어루만지며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졸업생 중 최고령자이자 졸업생 대표로서 정근식 서울시 교육감으로부터 졸업장을 건네받았을 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진형중고교 제18회 졸업식 풍경. 신석현 포토그래퍼

배 권사는 1970년 5남매 중 다섯 살이던 큰아들과 세 살배기 막내아들만 데리고 고향을 떠나 무작정 서울로 왔다. 세 돈 반짜리 금반지를 팔고 남은 1만500원이 전 재산이었다. 서울 동대문구의 빈대 가득한 월세 200원짜리 여인숙에 머물고 포장마차 일을 도우며 타향살이를 시작했다. 보리가 섞인 쌀 한 되를 겨우 사 아이들을 먹였다. 그마저도 없을 땐 사카린을 탄 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다. 그의 남편은 얼마 뒤 남은 세 딸을 데리고 상경했지만, 투병 끝에 먼저 하늘나라로 갔다. 배 권사는 평생 동대문시장에서 떡볶이 장사를 하며 홀로 다섯 아이들을 키워냈다.

“어려서부터 예수님만 믿고 살아왔기에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었어요. 여호수아 1장 9절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는 말씀만 생각하면 항시 마음이 편했어요.”

배 권사의 담임교사 김지영(46)씨는 “권사님께서 너무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해오셨다”며 “힘든 가운데에서도 불평 없이 감사함으로 채워가며 긴 학업 여정을 마치신 권사님의 앞으로 삶을 응원한다”고 말했다.

배 권사는 졸업식 후 가진 인터뷰에서 "지난해 4월쯤 독감으로 미처 학교를 못 온 것 빼고는 빠짐없이 수업에 나왔다"며 "공부를 시작한 후로 지금은 마음껏 성경책을 읽을 수 있게 돼 좋다"며 웃었다. 아래 사진은 같은날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은 손성은씨가 그동안 공부하며 품게 된 꿈을 이야기하는 모습. 신석현 포토그래퍼

이날 졸업식에서는 배 권사처럼 만학의 길을 걸어온 평균연령 67세의 만학도 611명이 중·고교 졸업장을 받았다. 그중에는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미싱을 돌리며 옷 만드는 일을 하느라 배움의 기회를 놓쳤던 손성은(58)씨도 있었다. 손씨는 손에 들린 고교 졸업장을 바라보며 “교회에서 봉사를 해도 늘 초등학교 밖에 못 나온 나 자신을 보며 자존감이 떨어졌는데 이렇게 졸업해 소원을 이루니 세상을 다 얻은 듯하다”며 감격의 눈물을 훔쳤다. 이어 “기도하던 제게 하나님께서 간호조무사의 꿈을 꾸게 해주신 만큼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가 예배자로 바로 서고 싶다”고 덧붙였다.
홍형규(단상 앞) 교장이 이날 졸업식에서 졸업생들을 격려하고 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홍형규 교장은 “이들이 걸어온 길은 희망을 향한 도전의 여정”이라며 “배움을 멈추지 않는 용기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이재식 이사장은 “교육은 단순한 학력 취득을 넘어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기회”라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