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일본 도쿄 메구로 퍼시먼홀 대극장. 일본 대형 엔터테인먼트 회사인 호리프로가 제작한 뮤지컬 ‘미생’이 무대에 올랐다. 지난 1월 10~14일 오사카, 2월 1~2일 나고야를 거쳐 이날 도쿄에서 개막한 ‘미생’(~11일)은 한국 동명 웹툰을 무대화한 것이다. 주인공 장그래 역으로 마에다 고키를 비롯해 하시모토 준, 시미즈 구루미, 아란 케이 등 무대와 드라마, 영화를 오가는 실력파 배우들이 나오는 등 출연진만 24명이나 되는 대작이다.
뮤지컬 ‘미생’은 극작가 박해림, 작곡가 최종윤, 연출가 오루피나 등 한국 예술가들이 핵심 창작진으로 참여했다. 일본에서 현지 제작사가 한국 콘텐츠를 가지고 한국 창작진과 만든 작품 뮤지컬은 ‘미생’이 처음이다. 이날 1200석의 메구로 퍼시먼홀 대극장은 만석에 가까웠으며 공연 뒤 기립박수가 나오는 등 관객 반응이 뜨거웠다.
윤태호의 동명 웹툰으로 처음 나온 ‘미생’은 프로기사 입단에 실패하고 종합상사 인턴으로 ‘낙하산’ 입사한 인턴사원 장그래의 고군분투를 다뤘다. 2014년 나온 동명 드라마는 직장인의 애환을 잘 보여줘 한국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얻어 2016년 ‘HOPE-기대 제로의 신입사원’이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 됐다. 한국 웹툰 원작이 일본에서 드라마화된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었다. 또한, 일본에서 단행본으로도 출간된 웹툰 ‘미생’은 2017년 일본 문화청의 미디어예술상 만화 부문 우수상으로 선정되기까지 했다.
이번 뮤지컬 ‘미생’을 기획한 호리프로의 이카와 가오루 프로듀서는 “나 같은 직장인이 이야기에 공감하고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만난 게 ‘미생’이었다”면서 “원작 만화의 주제가 국적이나 세대와 상관없이 통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대화할 때도 굳이 배경을 일본으로 바꿀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한국 창작진과의 작업으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호리프로는 앞서 여러 차례 작업한 오루피나 연출가를 창작진으로 먼저 낙점했다. 오루피나는 호리프로가 2015년 한국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와 공동제작해 초연한 뮤지컬 ‘데스노트’ 조연출로 참여한 뒤 2017년 재연 협력연출로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2023년 호리프로가 제작한 뮤지컬 ‘킹 아더’의 연출을 맡아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이카와 프로듀서는 “오 연출가가 ‘미생’의 진지한 드라마를 무대에 풀어내기에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 연출가와 다른 창작진 구성에 대한 대화를 나눴을 때 바로 박 작가와 최 작곡가로 의견이 일치했다”면서 “박 작가와 최 작곡가가 참여한 뮤지컬들이 이미 일본에서 공연돼 호평받은 바 있다”고 밝혔다.
뮤지컬 ‘미생’은 원작 웹툰의 방대한 이야기를 장그래가 속한 영업3팀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단순화했다. 뮤지컬 ‘전설의 리틀 농구단’ ‘나빌레라’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등 많은 히트 뮤지컬을 썼던 박해림 작가는 장그래의 성장이라는 핵심에 충실하면서도 장그래를 믿는 어머니의 사랑, 인턴사원들의 고민, 성차별 속에서 노력하는 여직원의 모습 등도 짧지만 영리하게 녹여냈다. 이 작품은 대사가 많아서 연극적이지만, 이야기의 주제를 분명하게 전달하는 음악의 힘도 만만치 않다. 뮤지컬 ‘마리 퀴리’ ‘곤 투모로우’ ‘셜록 홈즈’ 등으로 잘 알려진 최종윤 작곡가가 음악을 맡아 이번 작품의 매력을 더했다. 5인조 밴드가 연주를 맡았는데, 버추얼 오케스트라 프로그램을 활용해 12인조가 연주하는 것처럼 풍성하다.
특히 이번 뮤지컬 ‘미생’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오루피나의 연출이다. 바둑이라는 필터를 통해 세상을 보는 장그래의 마음을 보여주듯 영상과 래핑을 활용해 무대 위에 바둑판 라인을 보여주는가 하면 천정에서 무대를 실시간으로 비추는 등 참신한 무대공간을 만들어냈다. 여기에 사각의 프레임을 활용해 직장인들이 일하는 오피스 빌딩을 다채롭게 보여준 것도 인상적이었다. 오루피나 연출가는 “원작의 주제를 자극적이거나 과장하지 않고 심플하게 보여주고 싶어서 ‘비운 무대’를 추구했다”면서 “‘미생’은 일본 배우들과 작업한 세 번째 작품이다. 출연 배우들이 원작을 워낙 좋아하고 공감한 덕분에 뮤지컬 작업 과정도 정말 좋았다”고 밝혔다.
최근 일본 공연계에서는 한국 뮤지컬의 라이선스 공연을 넘어 영화, 드라마, 웹툰 등 인기있는 한국 콘텐츠를 원작으로 직접 뮤지컬이나 연극으로 제작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과거에도 인기 드라마를 무대화한 다카라즈카 ‘태왕사신기’, 뮤지컬 ‘드림하이’, 연극 ‘미남이시네요’ 등이 만들어진 적 있지만 근래엔 그 빈도가 잦아졌다. 지난 2023년 한국의 동명 드라마와 영화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빈센조’와 연극 ‘기생충’이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올해 ‘미생’에 이어 오는 6월엔 뮤지컬 ‘이태원 클라쓰’가 선보인다. 두 작품 모두 웹툰이 원작이며 드라마로 만들어져 한국을 넘어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내년엔 드라마 ‘악의 꽃’도 일본에서 연극으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이런 흐름은 일본이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한류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의지가 커졌기 때문이다. 단순히 일본에서만 공연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으로 역수출하거나 중국 등에도 라이선스를 팔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일본 공연 제작사들은 한국의 IP 제작사와 앞다퉈 업무 협약을 맺는 한편 한국 창작자들을 초청하고 있다.
이카와 프로듀서는 “뮤지컬 ‘미생’에 대해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권의 여러 회사와 협의 중이다. 머지않은 시기에 다양한 나라의 관객과 만나고 싶다”면서 “‘미생’ 다음으로는 기획 단계부터 한국의 제작사와 함께하는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오 연출가도 “일본에서 한국 창작뮤지컬의 완성도에 대한 평가가 높다. 그래서 최근 한국 작가, 작곡가, 연출가 등 창작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러브콜도 많아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도쿄=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