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 트루디, 제자 이병찬 작가의 ‘말 그 이상의 대화’ 전시회

입력 2025-02-07 15:43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과 생각을 담아내는 또 다른 방식이 있다. 바로 그림이다. 그림은 세상과 소통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며 때로는 언어보다 더 깊은 의미를 전달한다. 그림 속에는 그들의 삶, 꿈 그리고 희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극동방송 지하 1층 아트갤러리에서 오는 28일까지 진행 중인 ‘말 그 이상의 대화 (A Conversation Beyond Words)’ 전시회의 주인공은 스승 트루디 킴과 제자 이병찬 작가이다.

47년 전 스승 트루디는 장애인 학생들이 비장애인과 함께 배울 수 있도록 수원에 유치원과 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장애와 차별을 넘어 모두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배움터를 만들고자 한 그녀의 헌신은 많은 학생들의 삶을 바꿨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이병찬 작가였다.

자폐를 앓고 있던 어린 병찬이는 말보다 먼저 그림을 배웠고, 스승 트루디의 따뜻한 가르침 속에서 자신의 세계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법을 익혔다. 트루디는 학교에서 ‘트루디 파이숍’을 운영하며 직접 구운 파이를 팔아 장애 학생들을 위한 교육을 이어갔다. 그녀의 사랑과 헌신 속에서 병찬이는 성장했고, 이제 30대가 된 그는 전국에서 전시회를 열 만큼 당당한 전문 자폐 장애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두 사람의 역할은 바뀌었다. 병찬이가 그림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작가로 성장한 반면, 스승 트루디는 은퇴 후 오랜 암 투병 생활을 겪으며 이제는 말이 아닌 그림으로 마음을 전하고 있다. 한때 그림을 통해 제자의 세상을 넓혀주던 스승이 이제는 그림으로 위로받고 있다.

이번 전시회는 단순한 작품 전시를 넘어, 47년간 이어진 스승과 제자의 특별한 인연과 예술로 나눈 깊은 대화를 조명하는 뜻깊은 자리다.

‘심겨진 그곳에서 꽃을 피우라’

트루디 사모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지 올해로 65년째이다. 미국의 밥 존스 고등학교에서 코리안 김장환 목사를 처음 만난 그는 1958년 밥 존스대학교 졸업 이후 1주일 만에 결혼 후 한국행을 결심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항구를 출발해 17일간의 긴 항해 끝에 1959년 12월에 한국에 도착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불과 6년 뒤였다.

트루디 사모는 1960년부터 수원중앙침례교회에서 사역하는 남편을 따라 목회를 도왔다. 유아교육을 전공한 그는 “한국이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장애인을 존중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는 신념으로 1978년 수원중앙기독유치원에 이어 1994년에는 수원중앙기독중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학생이 같은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며, 신앙과 사랑을 통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통합교육을 실천했다.

장애인 통합교육과 인재양성을 위해 헌신한 트루디는 유치원에서 이병찬 작가를 처음 만났다.1994년 서울에서 태어나 자폐를 앓고 있는 병찬이는 수원중앙기독유치원에서 말보다 먼저 그림을 배웠다. 일상에서 매일 보고 느끼는 것들, 곁에 있는 친구, 가족 등 말로는 다 전하기 어려운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병찬이는 그림으로 세상과 소통하며 그렇게 작가로 성장했다.


트루디 사모는 초등학교 내에 파이숍(Trudy’s Pie Shop)을 세워 직접 빵을 굽고 판매하면서 수익금 전액을 장애아 특수교육에 사용했다. 화장실 청소와 주방 일 등 궂은일 역시 그의 몫이었다. 이로 인해 트루디 사모를 모르는 외부 사람들에게 종종 ‘외국인 파출부’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주어진 사명을 묵묵히 감당해 온 트루디 사모는 은퇴 후 10여년간 계속된 항암치료 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자 다른 이들에게 부담이 될까 말을 줄여갔다. 그러던 중 익숙지 않은 근육을 사용하며 도움을 받아 서툰 손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며 그의 그림은 새로운 대화의 방식이 됐다.

‘말 그 이상의 대화’ 전시회에서 트루디 사모는 일상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마늘, 화분, 연필과 같은 평범한 사물들을 오랜 시간 관찰하며 그림으로 담아냈다. 그녀의 작품에는 사소한 것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섬세한 시선이 담겨 있다.


특히 트루디 사모는 자신의 신념을 반영하듯 대부분의 작품을 꽃으로 표현했다. ‘심겨진 그곳에서 꽃을 피우라’는 그녀가 즐겨 인용하던 격언처럼, 그림 속 꽃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며, 가정을 돌보는 삶을 살아온 그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또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정성을 다해 삐뚤빼뚤한 글씨로 써 내려간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성경 말씀은 그녀의 신앙과 삶의 고백을 더욱 깊이 전해준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관람객들은 그가 믿음 속에서 걸어온 길을 작품을 통해 마주하고, 그 안에 담긴 따뜻한 시선과 깊은 신앙의 울림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트루디 사모의 아들 김요한 목사(대전함께하는교회)는 “어머니께서 그림을 그리신지 7년 정도 됐다. 처음에는 펜을 잡는 것조차 불편해하셨지만, 꾸준한 연습을 통해 점차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다. 그래서인지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 중에서도 그림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 연필을 그린 작품을 가장 좋아하시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이어 “20대에 선교사의 마음으로 한국에 오셔서 파이를 구우며 장애인 학생들과 함께했던 그 시절을 기억하며, 이병찬 작가와 함께 전시회를 열게 된 것을 매우 기뻐하고 계신다”면서 “이 작품을 통해 어머니의 삶과 신앙, 그리고 장애인들과 나누었던 사랑이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란다. 그림이 단순한 작품을 넘어 마음을 나누는 소통의 도구가 되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일상의 소중함을 되새기다
이병찬(왼쪽) 작가와 어머니 이남준 집사

1994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병찬 작가는 7살부터 수원 중앙기독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통합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소년은 말보다 먼저 배운 그림은 세상과 소통하는 도구가 돼주었다. 눈에 담긴 일상 속에서 매일 보고 먹는 것들, 곁에 있는 친구들, 말로는 다 전하기 어려운 감정들을 그림으로 그려냈다.

이 작가의 어머니 이남준 집사는 “어릴 적 병찬이는 하고 싶은 일이나 먹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들을 그림으로 표현하곤 했다. 말로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던 아이는 그림을 통해 누군가와 소통하고 삶과 일상을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왔다”면서 “트루디 사모님의 헌신으로 세워진 학교에서 많은 수혜를 받은 병찬이가 작가로 성장해 사모님과 함께 전시회를 열 수 있게 돼 무척 영광스럽다”고 밝혔다.


이 작가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그려보며 상상의 세계를 펼친다. 나에게 오지 않는 축구공, 내 마음대로 들어가지 않는 골프공도 그림 속에서는 자유롭다. 맥도날드의 감자튀김과 콜라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나비가 되기도 하고 지구 위에서 공놀이를 즐길 수도 있다. 더 많은 것들을 그리고 싶은 이 작가는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시간을 그려내며 일상의 소중함을 되새긴다.

그는 아들의 작품 중 ‘카페 스케치’를 꼽았다.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 공간을 공유하는 ‘죠스테이블 카페’에서 작가로 일하는 이 작가는 이곳에서 그림을 그린다. 이 작가의 그림을 보고 비장애인 손님들이 그의 그림을 갖고 싶어할때면 그들에게 시크하게 선물로 건넨다.


이 집사는 “카페의 일상을 담은 그림을 보고 울컥했다. 자폐 장애인들이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공간이 우리 사회에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곳은 장애인들이 여러 사람의 이해와 배려 속에서 머물러야 하는 공간이다. 그런 곳에서 병찬이는 선생님을 만나 그림 수업을 하고 사람들과 그림을 통해 소통했다. 아이가 이 공간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얼마나 의미 있는 곳이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아들과 같은 재능 있는 후배들이 더 많이 발굴되고 그들에게 다양한 기회가 주어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또한 트루디 사모가 설립한 학교나 장애인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죠스테이블 카페와 같은 공간이 더욱 많아져 더 많은 장애 아동들이 사회 속에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이 작가가 그런 후배들의 길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길 기대한다고도 덧붙였다.

이 집사는 “전시회를 방문하는 분들이 사진 속 자신을 그린 자화상을 통해 병찬이가 경험하는 평범하고 소소한 순간들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함께 느껴볼 수 있으면 좋겠다”며 “하나님께서 병찬이와 장애 아이들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은 이미 그 모습 그대로 완벽하며, 보시기에 심히 아름다운 것임을 깨닫길 바란다. 익숙하면서도 특별한 일상의 그림 앞에서 따뜻한 대화가 오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