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 독일 총선에서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독교민주연합 대표가 극우 성향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협조를 얻어 강력한 이민 대책을 담은 결의안을 통과시켜 논란이 되고 있다. AfD는 환영한 반면 독일 주류 정당들은 경악하고 있다. 독일에선 극우 정당의 암묵적 협조를 받는 것조차 금기시돼 왔기 때문이다.
29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 등에 따르면 독일 하원은 이날 메르츠 대표가 제안한 이민 제한 관련 결의안을 찬성 348표, 반대 345표, 기권 10표로 통과시켰다고 밝혔다. 해당 안건은 영구적 국경 통제 재도입, 유효한 문서 없이 입국 금지, 이민자 추방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해당 안건을 두고 현재 집권당인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이 반대했기 때문에 기민련과 AfD를 포함한 나머지 정당이 찬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메르츠 대표는 이날 의회 토론에서 “처음으로 AfD의 협조를 통한 법이 통과될 수도 있을 것”이라며 “국민들이 위협받고 다치고 죽는 문제를 무력하게 지켜볼 것인지 필요한 일을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할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기민련은 자매정당인 기독교사회연합과 함께 내달 23일로 예정된 독일 총선에서 집권이 유력하다. 폴리티코에 따르면 현재 정당 여론조사에서 기민련은 30%의 지지율로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어 AfD가 20%, 사민당이 17%, 녹색당이 14% 순이다. 어떤 정당도 과반에는 못 미치는 상황에서 기민·기사련과 사민당의 대연정 가능성이 가장 큰 것으로 점쳐졌다.
이런 상황에서 메르츠 대표가 AfD의 도움을 얻어 이민 규제 결의안을 통과시키며 독일 내 극우 정당이 연정에 참여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워졌다.
AfD는 축제 분위기다. 특히 이번 결의안은 AfD의 동의를 받아 통과된 첫번째 결의안이다. 엘리스 바이델 AfD 공동대표는 소셜미디어에 “독일에 역사적인 날”이라고 올렸으며 베른트 바우만 AfD 사무총장도 “좌익-녹색 주류에 대한 지배가 끝났다”고 강조했다.
독일선 극우 암묵 동의도 ‘금기’
문제는 나치를 겪은 독일 정치에서 극우와 연대는 ‘금기’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에 있다. 공식적인 연정이 아닌 극우의 암묵적 동의를 받는 것조차 큰 정치적 파장으로 이어져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후계자였던 안네그레트 크람프-카렌바우어 기민련 대표의 사퇴로 이어진 2020년 초 튀링겐주 정치 위기다. 2019년 튀링겐 주의회 선거에서 좌파 계열(좌파당-사민당-녹색당)과 우파 계열(기민련-자민당)은 각각 42석과 26석으로 모두 과반을 얻지 못했다. 22석을 얻은 AfD가 캐스팅보트로 떠올랐다.
이듬해 주 총리 선거에서 좌파 계열은 좌파당 소속의 보도 라메로브를 후보로 내세웠고 우파 계열은 자민당 소속의 토마스 켐메리히를 후보로 내세웠다. 이에 AfD 크리스토브 킨더파터까지 3파전으로 총리 선거가 치러졌다. 총리 선거는 1·2차 투표에서 과반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3차 투표에선 최다 득표자가 승리하기 때문에 좌파 계열은 승리를 확신했다.
하지만 3차 투표에서 켐메리히가 총리로 당선됐다. AfD가 킨더파터 대신 켐메리히에 몰표를 던진 결과였다. AfD가 ‘킹메이커’로서 존재감을 보이자 독일 정계는 충격에 빠졌다. 켐메리히와 자민당은 AfD와 사전 협의된 것이 아니었다고 항변했지만 앙겔라 메르켈 총리까지 나서 “용서할 수 없는 과정”이라며 재선거를 요구했다. 결국 캠메리히는 하루 만에 주 총리직 사퇴를 선언했고 크람프-카렌바우어도 책임을 지고 당 대표직에서 사퇴했다.
금기 깨진 獨 파장 예상 어려워
차기 총리로 유력한 메르츠 대표가 ‘극우 도움’을 받아도 상관없다고 천명한 것은 이때와는 차원이 다른 후폭풍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당내에서조차도 ‘정치적 자살’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는 형국이다.
폴리티코는 “독일의 주요 정당들은 오랫동안 AfD 주변에 방화벽을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에 메르츠가 극우 지지를 수용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은 엄청 중요한 의미”라며 “기존에는 AfD의 도움으로 입법을 통과시키는 것조차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선거에서 수세에 몰린 집권 사민당과 녹색당은 이를 계기로 반격에 나섰다. 사민당의 올라프 숄츠 총리는 “용서받을 수 없는 실수”라고 맹비난했다. 그는 메르츠가 제안한 결의안은 유럽연합(EU)법을 위반한다면서 “어떤 독일 총리도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라고 강조했다.
녹색당 소속의 아날레나 베어보크 외무장관도 “이 계획은 유럽을 파괴할 것”이라며 “메르츠는 유럽의 법을 어기고 독일 주변에 울타리를 쌓으려 한다”고 비판했다.
메르츠는 “AfD의 지지로 동의안이 통과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사민당·녹색당과 이민 문제에 대한 새로운 회담을 제안했다.
하지만 기민·기사련이 장기적으로 사민당·녹색당과 협조 체제를 갖출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롤프 뮈체니히 사민당 원내대표는 “보수 세력이 정치적 중심이 벗어났다”며 “평소처럼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김이현 기자 2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