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하순 ‘맛있는 녀석들’ 등 TV 예능으로 잘 알려진 개그맨 김준현(44)의 뮤지컬 데뷔 소식이 들려왔다. 2024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에 선정돼 2월 6일~3월 30일 서울 용산구 더줌아트센터에서 공연하는 극단 오징어의 창작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에 출연한다는 것이다. 치매를 앓고 있는 70세 주인공 고춘자와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에서 김준현은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큰 K장남 홍진수로 출연한다. 설 연휴 동안에도 작품 연습으로 바쁜 김준현을 만나 뮤지컬 출연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오래전부터 예능 외에 다른 장르에서 연기하고 싶었습니다. 이번 뮤지컬 캐스팅 제안을 거절하면 더 이상 연기 기회가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았어요. 게다가 개그맨의 코믹한 이미지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한 역할이라는 것도 좋았고요.”
사실 김준현은 대학가요제 출신으로 음반까지 냈을 정도로 방송계에서 가창력을 인정받고 있다. 이미 여러 음악 예능 프로그램에서 노래는 물론 수준급의 기타, 드럼, 하모니카 연주 실력을 보여준 바 있다. 그는 “10여년전 ‘개그콘서트’를 할 때 뮤지컬 출연 제의가 몇 번 있었다. 꽤 좋은 역할들도 있었지만 방송 때문에 뮤지컬 연습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포기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이제는 방송 스케줄을 조절하면서 연습에도 제대로 참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김준현이 대형 제작사의 라이선스 뮤지컬이 아닌 작은 극단의 창작 뮤지컬로 데뷔한 것은 의외다. 여기에는 창작 뮤지컬계 스테디셀러 ‘식구를 찾아서’를 쓰고 연출한 오미영 극단 오징어 대표가 김준현에게 보낸 이메일이 계기가 됐다. 오미영 대표는 “지난해 초가을 캐스팅 회의에서 누군가 개그맨 김준현이 뮤지컬을 하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래서 무턱대고 김준현에게 캐스팅 제안을 해보기로 했다”면서 “다행히 내가 개그우먼들이 출연하는 쇼 ‘드립걸즈’를 6년간 연출했던 덕분에 바로 김준현의 이메일을 얻을 수 있었다. 가난한 극단 상황 등에 대해 솔직하게 밝히고 대본과 음악을 한번 봐달라고 했는데, 얼마 안돼 수락 답변이 와서 정말 기뻤다”고 밝혔다.
오 대표의 이메일이 김준현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그 안에 담긴 진심이었다. 당시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가 창작산실 선정 결과를 기다리는 영세한 프로덕션이지만 진지한 역할을 연기하고 싶다면 함께하자는 제안에 김준현은 출연료 협의도 없이 수락했다.
김준현은 “메일을 읽고 오 대표와 그동안의 작품들에 대해 검색해 봤다. 그리고 대본과 음악을 다 보지 않은 채 출연을 결정했다. 매니저가 당황스러워했지만 ‘지금 하지 않으면 앞으로 이런 제안을 받지 못한다’며 밀어붙였다”면서 “주변에선 이왕 시작할 거면 대형 작품을 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말을 한다. 하지만 작은 작품부터 차근차근 밟아가는 게 진짜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오 대표는 “대본에 원래 진수가 하모니카를 부는 장면이 나오는데, 김준현이 하모니카까지 잘 분다. 김준현은 준비된 진수였다”고 칭찬했다.
치매 소재의 작품은 대체로 치매에 걸린 노인의 혼란스러움 아니면 간병하는 가족의 고통스러움에 포커스를 맞춘다. 하지만 ‘이상한 나라의 춘자씨’는 치매 노인의 판타지와 그 자식들의 가족애를 따뜻하게 그린다. 여타 창작 뮤지컬에서 흔히 보이는 자극적 요소는 하나도 없다.
김준현은 “오 대표의 심성이 따뜻해서 작품에 못된 캐릭터를 넣지 못하는 것 같다. 극단 오징어의 분위기도 정말 가족적이다. 전작들의 경우 오히려 21세기에 보기 어려운 따뜻함 때문에 사랑받았다고 들었다”면서 “내가 맡은 진수는 나이든 부모님을 봉양하고 자식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이 가는 인물이다. 소주 한잔 같이 하고 싶은 캐릭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개그맨이다보니 작품 속에서 개그를 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지만 참고 있다”고 웃었다.
흔히 가수가 뮤지컬에 출연한 뒤 가창력과 표현력이 좋아진다는 말이 있다. 뮤지컬에서는 2시간 넘게 배역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준현도 “연습 초반에는 하나의 인물이 되어 계속 연기하고 노래하는 게 좀 힘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배역에 빠져들면서 연기의 희열을 맛보고 있다”면서 “앞으로 꾸준히 뮤지컬을 하고 싶지만, 우선은 진수 역으로 관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싶다”고 강조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