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오후 6시 울산 시내 한복판. 설연휴의 시작과 함께 내린 겨울비로 땅이 젖어갈 때쯤, 파란색 축구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손에는 ‘우리의 문수는 파란색’ ‘울산 HD는 단 한 번도 붉은 적이 없었다’라는 팻말이 들려 있었다.
이들을 거리로 나서게 한 건 스포츠 현장에서 불거진 때아닌 ‘정치 논란’이다. 프로축구 울산 HD가 홈구장 문수축구경기장 관중석 일부 구역을 빨갛게 칠한 게 화근이었다. 울산의 팀 컬러는 파란색으로, 빨간색은 라이벌 포항 스틸러스의 상징색이기도 하다. 울산시설공단 측은 “축구의 역동성을 고려한 난색의 조합”이라고 설명했지만, 팬들 사이에선 국민의힘 소속 김두겸 울산시장을 의식해 당 상징색인 빨간색을 택했다는 게 중론이다.
빨간색 관중석 설치 반대 응원문화제를 진행하고 있는 ‘파란문수 지키기 비대위원회’는 29일 국민일보에 “울산 시민과 팬들의 반대에도 홈구장에 굳이 라이벌 팀의 상징색을 넣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인 행동”이라며 “시즌 개막 전까지는 매주 집회를 열겠다”고 전했다.
이는 지방단치단체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스포츠 구단의 쓸쓸한 민낯을 보여준다. 재정 여력이 충분한 기업 구단도 예외가 없다. 세법상 비업무용 부동산으로 분류되는 경기장을 민간 기업이 보유하거나 양도하려면 높은 세율을 부담해야 한다. 결국 구단은 ‘세금 폭탄’을 피하고자 지자체에 경기장을 빌려 쓰는 걸 택한다. ‘세입자’ 신세로 관중석 배치는 물론이고 경기장 광고 수익을 분리할 때도 큰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하물며 지자체장을 구단주로 둔 시·도민구단은 상황이 더 나쁘다. 정치 논리에 휘말리는 일이 특히 잦다. 충남아산FC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3월 충남아산은 국민의힘 소속 김태흠 충남도지사와 구단주 박경귀 아산시장이 참석한 홈 개막전에서 선수들에게 팀 컬러(파란색+노란색)와 상관없는 빨간색 유니폼을 입혔다가 팬들에게 뭇매를 맞았다.
이때 구단이 서포터즈에 빨간색 응원 도구와 깃발을 흔들도록 유도하면서 ‘간접 유세’ 의혹까지 일었다. 지난 22대 총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결국 한국프로축구연맹이 구단에 정치적 중립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경위서 제출을 요구하면서 상황은 일단락됐다.
예산의 대부분을 지자체에서 보조받는 시·도민구단은 정치 논리에 구조적으로 취약하다. 지난해 프로축구 광주FC는 광주광역시의회의 결정에 따라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엘리트(ACLE) 출전비용이 전액 삭감됐다가 다시 복원됐다. 예정대로 대회는 나갔지만 구단의 열악한 재정 상황과 시의회와 긴장 관계는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양당 알력다툼의 희생양이 된 사례도 있다. 이성헌 구청장(국민의힘) 주도하에 창단한 서대문구청 여자농구단은 구청장과 더불어민주당 기초의원들의 대립이 극에 달하면서 해체 위기를 맞았다. 최근 구의회에서 예산안이 전액 삭감되면서 존폐 갈림길에 섰다. 이들의 예산안이 다뤄질 회의는 지난해 말을 끝으로 여전히 열리지 않고 있다.
구의회 소속 A의원은 국민일보에 “원래는 의원들끼리 예산안을 약 1억5000만원 정도만 감액하기로 했지만 현재는 여야 합의가 깨진 상태”라며 “회의가 다시 열리더라도 농구단 예산을 복원하긴 어려워 보인다”고 귀띔했다.
이누리 기자 nur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