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제22대 국회에서 첫걸음부터 삐걱거렸다. 거대 야당이 쟁점 법안을 단독 처리하고 대통령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번번이 행사하는 전대미문 상황이 20차례 이상 되풀이됐다.
대통령 부부가 직접적 수사대상인 김건희·채상병 특검법부터 ‘남는 쌀 강제 매수법’이라고 외면한 양곡관리법까지 무차별적 대통령 거부권이 이어졌다. 당연히 국회 입법권 침해와 3권 분립 훼손이라는 거센 논란이 여기저기서 불거졌다.
심지어 여소야대 국회는 지난해 대통령 거부권 범위를 제한하는 특별법을 발의·제정한다고 으름장을 놨고 윤 대통령은 이마저 거부할 것으로 점쳐지기도 했다.
여기에 굴욕 외교 시비와 6개월간 장관, 검사, 감사원장 등 10차례가 넘는 탄핵 정국으로 윤 대통령과 대의 민주주의 본산인 국회 사이 틈은 회복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윤 대통령 집권 이후 정부가 국정 목표 실현을 위해 제출한 420건 중 국회를 통과한 법안은 278건에 그쳤다.
윤 대통령과 국회 간 얽히고 얽힌 속박은 국정을 질곡에 빠뜨린 12·3 비상계엄 선포로 절정에 달했다. 2시간여 만에 국회 의결로 비상계엄은 수포가 되었지만 나라 살림 전반에 생채기는 여전하다.
해결이 어려운 숙제는 항상 누가 옳으냐를 따지는 어리석음에서 생긴다. 무엇이 아닌 누가 옳으냐를 애써 가리려고 하면서 소모적 갈등이 양산된다.
둘 다 옳을 수도 둘 다 틀릴 수도 있다. 한쪽 만이 옳거나 틀리지 않는다는 균형 잡힌 관점에서 해법을 찾기 위한 생산적 논쟁을 벌여야 한다.
윤 대통령은 국회 권력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 대통령실과 검찰, 감사원의 특활비와 예비비까지 삭감하는 국회의 전횡 속에서 제대로 국정을 꾸릴 수 없었다고 강변하고 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집권 직후 집권세력의 화합을 도모하기는커녕 갈팡질팡하면서 정권의 정체성을 살리지 못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임기 초기부터 원자력 정책 등에서 과거 정권 탓만 반복했다. 그러면서 ‘사람이 아닌 조직에 충성한다’는 말로 주목받은 참신성을 잃어갔다.
정권 탄생에 이바지한 이준석 전 대표 등은 전광석화처럼 내쳤다. 뚜렷한 지향점도 제시하지 못했다. 2년 6개월 국정 책임을 맡아왔지만, 과거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와 같은 구호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정부 중책을 맡은 다른 이들도 윤 대통령의 ‘국회 혐오 발화’에 동참했다. 국회가 국정의 발목을 무리하게 잡는다는 고정관념이 똬리를 튼 것이다.
다수의 편견이 작동하는 거대 조직은 소외된 소수를 돌보지도 공공이익을 헤아리지도 않는다. 권한을 가진 다수의 오만은 그래서 위험하기 그지없다.
검찰 출신인 윤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는 지금까지 직선적 선악 논리만 강요해왔을 뿐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하는 제도권 정치에는 적응하지 못했다.
윤 대통령은 심지어 12·3 계엄선포 명분으로 부정선거를 자꾸 거론하면서 권력의 정통성조차 스스로 파괴했다. 사적 도구로 전락한 권력과 특권은 어느새 정권 탄핵이라는 부메랑의 칼날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정치 평론가들은 이를 두고 정치문화(Political Culture)와 권력구조(Political System)의 괴리감에서 발생한 제왕적 대통령제 한계라고 분석한다.
한마디로 ‘왕정’에 익숙한 우리 문화에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다는 이론이다.
다행히 현명한 ‘왕’의 DNA를 가진 이가 권좌에 앉는다면 민주주의와 함께 상징적 권위가 유지될 확률이 높다.
대통령 권위에 대한 비판, 견제를 회피하는 문화가 불가피하게 형성되지만 입법·행정·사법 권력분립을 기반으로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다.
만일 그 반대라면 권력자는 국가발전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다. 막강한 권력이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에게 집중된 체제에서 견제 기능을 제도적으로 살리기는 대단히 어렵다.
편애는 소수의 교만을 낳고 박애는 다수의 무질서를 잉태한다는 격언은 권력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유권자 4%가 아스팔트 길거리로 쏟아져나오면 권력이 무너진다는 사회과학자의 속설도 요즘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법원이 이례적으로 불탄 가운데 탄핵 재판에 대한 국민적 피로감은 벌써 만만치 않다.
국론 분열의 아픈 생채기는 누구의 탓인가. 아니 무엇 때문인가. 막강한 권력을 누리던 대통령의 몰락을 지켜보는 대다수 국민은 진정 마음이 편치 않다.
검찰에 의해 재판에 넘겨진 윤 대통령 운명이 불명예스러운 퇴진일지 화려한 복귀일지 아직 불분명하다. 결정적 오점은 그가 국민에게 권력을 위임받은 최고위 공직자로서 이미 중대 실책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왕으로 상징되는 대통령제 중심의 권력 구조는 무한책임을 전제로 한다. 과거 조선시대만 해도 왕은 농사를 짓기 위한 비만 오지 않아도 자신의 탓이라고 불면의 밤을 보냈다.
윤 대통령은 한때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손바닥에 왕(王)자를 새겨 무속과 주술에 의존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자에 밝은 광주시의 한 고위공무원은 멧돼지(犭)처럼 왕(王)이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면 광인(狂人)이라고 부른다는 색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자기 권력에 취해 좌충우돌하지 말라는 선인들의 경고가 아닌가. 윤 대통령은 무속과 주술에 심취한 것으로 알려진 김건희 여사에 대한 애정이 넘친 탓인지 윤건희 대통령이라는 비아냥도 마냥 흘려들었다.
그런데도 12월 3일 밤 10시 30분 비상계엄 선포 일시조차 주술적 해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날짜와 시간을 각각 한자로 이어 조합하면 十ニ월, 三일 十시, 三十분으로 王(왕)자 3개가 연상된다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라고 웃어넘기기에는 예사롭지 않다.
대통령을 왕에 비유하는 건 시대착오적이다. 절대권력을 세습 받아 누리던 왕과 다수결 투표로 탄생하는 대통령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제왕적 대통령제라도 그렇다.
국민 행복을 도외시하는 대통령의 말로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검사 시절 특정 개인보다 조직에 충성한다고 외친 윤 대통령.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이순신 장군은 충(忠)은 언제나 백성(民)을 향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반성 없는 권력은 항상 부패한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율적 권위와 타율적 권위, 자율적 독재와 타율적 독재를 거론한 적이 있다. 오래전 대면한 자리에서 직접 들은 얘기다. 권력자 권위는 자신이 만드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윤 대통령은 철권 통치를 꿈꿨는지 모른다. 계엄 실패로 구치소에 갇힌 이후에도 그는 국회의 계엄해제와 탄핵이 부당하다고 절실히 느끼고 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이 쓴소리를 전혀 하지 않는 참모진 틈바구니에서 영구집권 시나리오를 만들었다고 하면 지나친 망상일까.
대부분 국민은 난데없는 ’비상계엄’ 선포를 그들만의 리그에 안주한 집권세력이 벌인 희대의 참사로 받아들이고 있다.
“계엄령은 계몽령이다” “의원 아닌 요원을 빼내라고 했다”는 궤변은 초라함만 더할 뿐이다.
윤 대통령은 한때나마 최고 권력자로서 명예와 권력을 누렸지만 장고 끝에 ‘헛발질’을 하고 말았다. 꼬리가 커지면 흔들기 어렵다. 더 이상 합리화에 몰두해서는 안된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현명한 마무리가 중요한 시점이다.
더 늦기 전에 미대난도(尾大難掉)의 교훈을 뼈아프게 되새겨야 한다.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마지막 ‘출구 전략’을 짜야 한다.
광주=장선욱 기자 sw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