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환율 영향 ‘기상도’ 그려보니…조선·자동차·기계 제외 대다수 업종 ‘흐림’

입력 2025-01-25 14:56

고환율이 국내 산업 전반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수출 효과에 대한 기대감보다 원자재 수입 비용과 해외 투자비 증가에 따른 부담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과 함께 환율 리스크에 대한 업계와 정부의 적극적인 대비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주요 업종별 협회 12곳과 함께 ‘고환율 기조가 주요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기상도로 표현한 결과, 바이오·반도체·배터리·철강·석유화학·정유·디스플레이·섬유패션·식품 산업은 ‘흐림’, 조선·자동차·기계 산업은 ‘대체로 맑음’으로 나타났다.

제약·바이오 산업은 원료 의약품 수입 의존도가 높고 해외 임상시험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어 고환율에 따른 비용 부담이 크다. 2023년 기준 원료 의약품 국내 자급률은 25.6%에 그친다. 한국바이오협회는 “수출을 주도하고 있는 바이오시밀러·위탁개발생산 업체의 수출분에 대해선 환율 효과가 있기도 하지만, 국내 기업 대부분은 원료 의약품 및 소재부품장비 수입 의존도가 높아 수입 원가가 상승하고 해외 임상 비용 증가 등 연구·개발(R&D) 투자 비용이 늘어 이중고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철강업은 수요 산업 부진에 따른 수출단가 하락, 높은 원자재 수입 비중으로 인한 어려움이 컸다. 한국철강협회는 “철강 수요 산업 부진 및 중국 과잉생산에 따른 수출단가 인하로 환율 상승의 혜택도 제한받는 상황에서 철광석, 연료탄 등 거의 전량을 수입하는 원자재 부담마저 크다”고 진단했다. 다만 냉연·강관 등 수출 비중이 높은 일부 품목 중심으로 기대감을 비치기도 했다.

석유화학 산업은 나프타 등 원재료 가격 상승과 업황 악화를 가장 큰 부담 요인으로 꼽았다. 국내 석유화학업계는 기초 원료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한국화학산업협회는 “환율 상승이 석유화학 매출 증가 및 무역수지 개선 요인으로 작용하나, 글로벌 공급과잉에 따른 수급 불균형 등 업황 부진을 고려할 때 환율 상승이 수출 증대와 수익성 개선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평가했다.

고(高)환율 산업 기상도

정유 산업은 주요국 경기 부진과 수출 경쟁 심화로 지난해 하반기부터 업황이 고꾸라졌다. 여기에 고환율 지속에 따른 채산성 및 재무구조 악화를 우려하고 있다. 대한석유협회는 “원유 수입 시 은행이 우선 수입처에 대금을 지급하고 일정 기간 후 정유사가 은행에 대금을 상환하는 구조인데, 환차손이 발생해 경영 환경 악화가 우려된다”며 “위기가 지속한다면 설비가동률과 투자 축소 가능성 얘기까지 나오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산업은 고환율에 따른 제조원가 및 해외 투자비 증가를 우려했다. 고종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략기획실장은 “반도체는 우리 수출의 약 20%를 차지하는 대표적인 수출 품목이고 달러 결제 비중도 높아 환율 상승에 따른 단기적 매출 증대 효과는 분명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반도체 분야 소재부품장비의 국산화율이 30% 수준으로 생산원가가 증가하고 국내 주요 기업이 미국 등 해외 반도체 제조공장 설립에 투자하기 때문에 이런 효과가 상쇄된다”고 봤다.

배터리 산업도 대규모 해외 투자에 따른 외화부채와 리튬, 흑연 등 핵심 원자재의 높은 해외 의존도가 문제다. 김승태 한국배터리협회 정책지원실장은 “고환율에 따라 시설 투자 비용과 수입 원자재 비용 부담이 증가하고 있다”며 “다만 핵심광물 가격은 공급과 수요에 의해 결정되는 측면이 크고 배터리 업체 역시 광물과 배터리의 판매 가격을 연동하는 계약을 통해 환손실을 만회하려는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디스플레이 산업도 ‘흐림’으로 전망됐다. 한국디스플레이산업협회는 “현재 추진 중인 베트남 등 해외 제조공장의 건설비와 장비 구매액이 늘면서 업계 부담이 커지고, 국내에선 노광장비 등 수입 의존도가 높은 소재부품장비의 구매 비용이 증가한다”고 했다. 다만 디스플레이 산업의 경우 수요 기업의 사전주문을 받아 생산하는 방식으로 수출량 변동이 적어 환율 상승 시 일부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는 분석이다.

섬유패션 산업은 10인 미만의 영세업자가 많아 환율 상승에 따른 타격에 더 민감하다. 한국섬유산업연합회는 “10인 이상의 섬유패션 업체 수는 전체의 약 8%에 불과할 정도로 영세업자가 많다”며 “원부자재 수입 비중이 높은 중소 업체는 고환율 지속 시 수입 단가 상승에 따른 채산성 및 수익성 악화로 생산 부진이 더욱 심화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식품 산업도 원자재 가격 상승 부담을 첫손에 꼽았다. 국내 식품 제조업의 국산 원재료 사용 비중은 31.8%로 밀, 대두, 옥수수, 원당 등 주요 원재료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수입 원자잿값이 상승하면 제품 가격 인상 압력도 커진다. 한국식품산업협회는 “현 상태의 고환율이 지속하면 판매 가격 인상이 불가피하다”며 “이에 더해 최근 법안 발의돼 논의 중인 GMO 완전표시제가 도입될 경우 대두, 옥수수 등 Non-GMO 원료 확보에 따른 가격 상승으로 1~3차 가공품의 가격 인상이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협회 측은 “주요 식품 원자재의 수입 관세를 일시적으로 인하하는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고환율의 긍정적 측면을 더 크게 보는 곳은 수출 비중이 높은 조선, 자동차, 기계 산업 정도였다. 하지만 이들 역시 고환율이 장기화할 경우 원가 상승에 따른 판매가 상향, 수요시장 위축, 물류비 인상 등 역풍을 우려하고 있다.

조선업은 지난해 1~3분기 전체 수주량 중 96.3%가 수출 물량일 만큼 수출 비중이 크다. 또한 계약 후 대금의 상당량이 선박 인도 시점에 결제돼 환율 상승으로 인한 차익이 기대된다. 다만 조선사별 환헤지 비중이 달라 최근 고환율 기조로 인해 해외 기자재 사용률과 라이선스 비용 확대로 환율 상승 효과가 제한되는 경우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는 “LNG운반선의 핵심설비인 화물창 기술을 해외에 의존하고 있어 산업계의 비용 부담이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 생산의 67%를 수출하는 자동차 산업은 환율 상승 시 일부 완성차는 단기적으로 영업이익이 개선된다.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 관계자는 “주요 완성차 업체의 경우 글로벌 생산의 50% 이상을 현지 생산하는 체계를 갖춰 환율 변동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다”면서도 “고환율 장기화 시 오히려 부품 수입가·에너지 비용·해상 운임비 상승 등 원가 압박으로 환율상승의 긍정적 효과가 반감되는 한편 부품 업계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고환율로 인한 국내 소비자의 구매력 약화로 자동차 내수시장이 위축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기계 산업은 수출 위주의 산업구조, 수입 원자재에 대한 영향을 적게 받는 특성에 따라 환율 상승에 따른 이익을 기대했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기계장비의 수입 의존도는 0.134로 정보통신기술(ICT·0.236) 등 타 산업 대비 낮다. 한국기계산업진흥회는 “그럼에도 고환율이 지속되면 원자재 조달 비용 증가, 투자 감소 등으로 수입이 수출보다 크게 주는 불황형 흑자가 발생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이종명 대한상의 산업혁신본부장은 “이제 막 출범한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관세 인상, 금리 인하 속도조절 등이 시행되면 당분간 고환율이 지속될 것”이라며 “국내 경제가 고환율 파고에 휩쓸리지 않게끔 환헤지 등을 위한 기업의 노력과 더불어 미국 등 주요국과 통화 스와프라인 확대 추진, 환율 피해 산업에 긴급 운영 자금 및 금융 지원 제공 등 정부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혜원 기자 ki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