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재 전 국회 사무총장이 12·3 비상계엄 사태를 ‘정치 IMF(국제통화기구)’ 위기로 규정하며 ‘대한민국 재설계’를 촉구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며 IT 시대를 열어젖힌 것처럼 이번의 국가적 위기를 대전환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주문이다.
이 전 총장은 특히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신성장의 주요 기회로 활용하자고 제언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 심리와 별개로 정치권과 경제계가 함께 ‘자문기구’를 꾸려 트럼프 행정부와의 협상을 준비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원조 친노’(친노무현)인 이 전 총장은 25일 국민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트럼프 2.0 시대 대응이 대한민국 재설계의 핵심 과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원도지사와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국회의원 3선 경력의 그는 지난해 4·10 총선 경기 분당갑에 출마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다음은 일문일답.
-비상계엄 사태로 대한민국이 총체적 위기에 빠졌다.
“이번 계엄을 ‘정치 IMF’ 위기라고 보고 있다. 계엄 사태 이후 원·달러 환율이 1500원대에 근접하고 주식 가치도 250조원이 증발하는 등 매우 위험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윤 대통령이 헌법재판소 심리에서 혐의를 전면 부인하는 것도 국민적 실망과 좌절감을 키우는 요소다.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윤 대통령 탄핵은 결국 인용될 것으로 본다.”
-왜 ‘정치 IMF’인가.
“28년 전 IMF 외환 위기 때 30대 대기업 중 17곳이 무너졌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리더십과 DJP(김재중·김종필) 연합으로 위기를 극복했고, IT 시대라는 새로운 패러다임도 열었다. 이번 기회에 ‘낡은 정치’는 완전히 무너져야 하고, 인공지능(AI) 시대를 이끌 새로운 정치 리더십이 등장해야 한다. 정치를 둘러싼 과거의 문법과 질서는 붕괴할 것이고, 신성장을 만들어낼 리더십에 우리나라의 미래가 달려있다.”
-조기 대선이 현실화됐을 경우의 시대정신은.
“이젠 주술이 아닌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정상 국가’가 화두가 돼야 한다. 강력한 경제성장을 기초로 정상적인 삶이 숨 쉬는 국가로 돌아가야 한다. 지난해 말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뒤 국가적 자신감이 가득하던 순간을 기억하나. 막강한 경제 안보 정책을 중심으로 ‘세계 정상권’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대통령 탄핵심판과 별개로 지금 정치권은 뭘 준비해야 하나.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시작을 맞아 ‘넥스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준비해야 한다. 미국은 한·미 FTA 재협상을 주장할 수 있는데, 양국의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윈윈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여기에서 강력한 경제성장 동력을 찾아야 한다. 지난해 여름부터 트럼프 재집권이 나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방위비 협상과 관세 문제를 들고나올 게 뻔했기 때문에 어떻게 대응할지에 관심이 집중됐다. 친분이 깊은 한 인사가 트럼프의 사무실에 간 적 있는데 골프 치는 사진 옆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찍은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다고 하더라. 남북 관계의 변화에 더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밀월 시대까지 오면 한반도 안보에도 엄청난 변화가 예상된다.”
-‘넥스트 한미 FTA’의 구체적인 복안은.
“먼저 에너지 협력이 필요하다. 미 알래스카의 석유·가스 자원을 수입해 에너지 안정성을 높이고, 한·미 동맹도 강화할 수 있다. 크리스 라이트 미 에너지부 장관 지명자는 셰일가스 관련 최고경영자였다. 에너지 수입을 위한 파이프라인·가격·물량 등 치열한 협상이 필요하다. 알래스카∼그린란드∼동해로 이어지는 북극항로 협력도 중요하다. 북극항로를 통해 부산과 광양이 세계 최대의 물동량을 보유한 항구로 도약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높게 평가한 우리 조선 산업과의 협력을 통해 ‘해양 동맹’ 시대를 여는 것도 과제다. 미국은 중국보다 조선 산업이 약하기 때문에 북극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한국과 파트너십을 맺으려 한다. 쇄빙선 건조 등 높은 기술력을 가진 우리 조선 산업에도 큰 기회다.”
-정·재계가 함께 논의할 부분은 뭘까.
“과거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해 봤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자문기구를 구성해야 한다. 김현종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과 노무현·이명박정부 시절 통상교섭본부장으로 한미 FTA 체결에 관여한 김종훈 전 새누리당 의원, 류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 등이 주요 대상이다. 반도체 분야를 위해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포함돼야 한다. 이런 인사들이 함께 대책을 논의해야 한다.”
-국회의 역할은.
“국회 지원도 필수다. 당장 오는 10월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매우 중요하다. 여야가 국회 내에 ‘APEC 지원 특별위원회’를 만들면 좋겠다. 계엄 사태 이후 우리나라에 대한 인식을 되돌려 놓을 기회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인들은 지금 한국을 ‘조금은 어수선해 보이는 나라’로 여길 것이다. APEC이 이런 리스크를 해소할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다. 특히 천년 고도 경주를 세계 지도자들의 연회장으로 만들길 바란다. 트럼프 대통령, 푸틴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등 정치 지도자와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젠슨 황 엔비디아 CEO,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 등 기업인들에게도 초청장을 보내면 어떨까.”
박장군 기자 genera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