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는 아들, 안 들리는 엄마의 즐거운 동행…‘수다람툰’ 이야기

입력 2025-01-25 01:00 수정 2025-01-25 01:00
전씨 가족의 모습. 전씨 제공

청각장애인 전신영(40·여)씨는 2년 차 만화 작가이자 초등학생 아들을 둔 엄마다. 인스타그램에서 연재 중인 그의 작품 ‘수다람툰’에는 코다(청각장애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비장애인 자녀) 아들, 농인 남편과 함께하는 일상이 펼쳐진다. ‘안들리는 부모, 들리는 아들’의 단란한 일상은 독자들에게 예상치 못한 감동과 즐거움을 안긴다.

9살 아들 보보가 "엄마, 좋아"를 말하는 방법
수다람툰 인스타그램 피드 캡처

수다람은 ‘수어로 대화하는 다람 가족’을 줄여 만든 말이다. 만화 속 귀여운 다람쥐 가족은 티격태격하면서도 화목한 전씨 가족을 쏙 빼닮았다.

세 사람의 잔잔한 일상은 따뜻함을 선사하지만 현실에서 청각장애인이 자녀를 키우는 일은 만화처럼 유쾌하지만은 않다. 영유아 때는 한시도 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고, 새벽에 우는 소리를 듣기 위해 보조 기기를 마련해야 했다. 전씨는 “성장하는 아이를 보면 더없이 기쁘지만, 장애 때문에 충분히 돌보지 못할까 봐 걱정된다”고 털어놨다.

소리의 부재로 인한 불편함도 없진 않겠으나 그를 더 힘들게 하는 건 농인 부모를 향한 주위의 시선이다. 그는 최근 아이가 아파 병원을 방문했는데, 의사는 전씨를 외면하고 아이와만 소통하며 진료를 마쳤다. 전씨에겐 병명과 몇 가지 주의사항만 필담으로 전했다. 전씨는 “아들의 건강 문제에서 내가 배제되는 느낌이 들었다”면서 “부모의 역할을 인정받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수다람툰 ‘아이 재울 때 엄마가 눈 뜨는 이유’ 에피소드 캡처

만화에 등장하는 아들 ‘보보’는 9살 청인이다. 모자가 다정히 눈을 맞추고 손짓으로 말하는 모습은 만화의 소소한 힐링 포인트다. ‘아이 재울 때 엄마가 눈을 뜨는 이유’라는 제목의 에피소드에서는 불 꺼진 방에서 보보가 전씨에게 ‘엄마’ ‘좋아’라는 의미의 수어를 반복하는 장면이 나와 독자들을 감동케 했다.

전씨는 보보와 간단한 수어로 소통하지만, 따로 가르친 건 아니다. 전씨는 “청인 부모들이 자녀와 소통하려고 자음과 모음을 가르치진 않는 것처럼 나도 보보와 그저 내 언어인 수어로 대화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웃픈 일상'을 에피소드로… 만화로 풀어낸 농인의 세계


전씨는 2023년 3월부터 인스타그램 만화 작가로 활동했다. 현재 2000명이 넘는 독자를 보유하고 있다. 전씨의 삶은 그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관심도 없고, 손재주는 더 없어 주위 사람에게 ‘마이너스의 손’이라 불렸다. 돌연 만화를 그리겠다고 결심한 건 자신의 삶을 제대로 알리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

선천적 농인인 전씨는 장애인에 대한 수동적인 이미지를 깨고 싶었다. 사회에서 장애인의 불편함과 고통이 과하게 주목받는 경향이 있다고 느꼈다. 전씨는 “장애인도 주체적으로 재미있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걸 알리고 싶다”며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창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들에겐 평범하지만, 대부분에겐 평범하지 않은 일상 덕분에 소재는 넘쳐났다. 농인으로 살면서 겪은 다양한 사건들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 흥미진진한 에피소드가 됐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 곤란했던 경험부터 은근한 차별에 서러웠던 기억까지 담겼다.

‘수다람툰’의 특징은 작품 전체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수어다. 구화(입 모양을 읽고 말하는 대화법)를 사용하지 않는 전씨에겐 수어가 유일한 소통 수단이다. 그는 “청각장애 그림 작가 중에서도 수어로만 소통하는 작가는 드물다”며 자부심을 내비쳤다.

각 회차의 마지막 장에는 수어 어휘를 알려주는 코너도 넣었다. 이를 보고 수어를 배우기 시작한 독자도 있다고 한다. 전씨는 “내 만화가 좋은 영향력을 주고 있다고 느낄 때 가장 뿌듯하다”고 전했다.

“농인 부모님, 아이에게 미안함 대신 사랑 주세요”


전씨는 코다 자녀를 키우는 농인 엄마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처음으로 아이를 가진 전씨에게 ‘코다맘 모임’은 든든한 길잡이가 돼줬다. 아이를 어떻게 교육해야 할지 막막할 때면 선배 엄마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보보가 8개월 아기일 때 가입한 모임은 지금까지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이제 어엿한 코다맘이 된 전씨는 농인 부모들을 향해 “무엇보다 청인 자녀에게 미안함을 갖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그는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는 순간 자녀는 자신이 부모를 도와줘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다”며 서로가 의지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가라고 충고했다.

전씨는 현재 각종 일러스트 전시와 강연에 참여하며 적극적으로 농사회와 농인 작가에 대해 알리고 있다. ‘덕분에 농인에 대해 잘 이해하게 됐다’는 독자 후기는 전씨가 쉬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그는 “기회가 된다면 다른 농인 부모의 경험도 만화로 풀어내고 싶다”며 “장애인의 삶이 얼마나 유쾌한 지 많은 분이 내 만화를 통해 알게 되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농담]은 일상 속 농인들을 취재합니다. 청인사회와 같은 듯 다른 농사회의 모습, 소리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유쾌하고 진실한 이야기에 주목합니다.


정고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