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바뀌는 현대 사회에서 자신만의 속도로 고유한 맛을 빚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전통 장을 만드는 ‘아나농’의 대표 김민솔(32)씨도 그중 하나다.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는 유네스코가 지난달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할 정도로 세계적인 조명을 받고 있는데, 지난 10일 만난 김씨는 이와 관련해 강한 자긍심부터 드러냈다. 그는 “(유네스코 덕분에) 전통 장의 수명이 더 늘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안도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전통 장의 가치와 자신의 사업 스토리를 자세히 들려줬다.
스물 넷 청년, 전통 장 사업에 뛰어들다
김씨가 오래전부터 전통 장 사업을 계획한 건 아니다. 대학에서 생명교육학을 전공한 김씨는 원래 교사의 길을 걸으려고 했다. 하지만 임용시험을 준비하면서 ‘교사가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일까’라는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그러던 중 김씨의 삶에 터닝 포인트가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귀농을 결심한 어머니와 함께 충남 청양에 잠시 머물게 됐는데, 어머니는 외할머니로부터 배운 전통 장을 사업화하려는 생각을 내비쳤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사업 방안을 고민하다가 전통 장에 매료됐다. 결국 그는 스물네 살이던 2016년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가 세운 사업체 아나농은 ‘아름다운 나라의 농부’의 줄임말이다.
“지금껏 공부하던 걸 던져버리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게 두렵기도 했어요. 사업도 모든 게 처음이라 어려운 점도 많았죠. 하지만 직접 상품을 발주하러 다니고, 제품 마케팅도 고민하며 하나씩 만들어가는 과정이 정말 재밌었어요. 그때 ‘이 일이 바로 내게 맞는 일이구나’라는 확신이 들었죠.”
전통 장은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제품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게 김씨의 설명이었다. 그는 “시판 제품은 전통 장의 맛을 단기간에 내기 위해 합성 첨가물을 사용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맛은 자연 발효된 전통 장 고유의 맛과는 많이 다르다”고 강조했다.
물론 이런 장을 만드는 게 쉬울 린 없다. 시판 제품보다 손이 많이 가고, 수익성도 떨어진다. 그럼에도 이 일을 이어가는 것은 사명감 때문이다. 자연이 빚어내는 전통 장의 고유한 맛을 지키고 싶은 것이다.
귀농 청년, 사장이 되기까지
다시 사업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호기롭게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김씨에게 사업 초창기는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개당 40만~50만원에 달하는 항아리를 장만하는 일조차 버거웠다. 돈을 모아 항아리 하나를 사고, 다시 돈을 모아 또 하나를 샀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기에 주먹구구식으로 하나하나 배워나가야 했다. 자재 구매부터 제품 디자인까지 모든 걸 도맡아야 했다. 관련 법령도 공부했다. 어린 나이에 사업을 시작한 탓에 무시를 당할 때도 많았다.
“매장에서는 저를 아르바이트생이나 직원으로 생각하는 분이 많았어요. ‘장은 내가 더 많이 담가봤다’며 잘못된 정보를 전하는 분도 계셨죠. 그런 분들은 제가 사장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하시더군요.”
그래서 김씨는 늘 30대가 되고 싶었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면 함부로 평가받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제는 사업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어요. 어린 나이에 사업을 시작했다는 걸 안 뒤엔 당차다고 인정해주는 분도 많아졌죠. 평범한 애는 아니구나, 이렇게 봐 주시는 게 느껴지더군요.”
귀농을 선택했다고 해서 사범대에서 보낸 시간이 무의미해진 건 아니었다. 그는 교육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고추장 체험 키트를 개발했다. 이 키트로 농촌진흥청 주최 ‘2022년 가공상품 마케팅 우수사례 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김씨는 “아이들이 농촌 체험을 하며 전통 장의 중요성을 배우기보다는 단순히 재료를 섞는 활동에만 집중한다는 점이 아쉬웠다”며 체험 키트를 구상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김씨는 아이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귀여운 디자인을 입혔고, 교육 자료 제작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작은 책자에 설명과 퀴즈를 넣고, 동영상 자료를 통해 아이들이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방식으로 완성된 키트는 전국의 학교로 보내졌고, 청년 농업인들을 강사로 고용하는 교육 사업으로도 확장됐다.
"가끔은 무모한 게 좋을 때 있어"
청년 농업인에게 첫 시작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아는 김씨는 그들과 상생하는 미래를 꿈꾸고 있다. 그는 장의 원재료를 충남의 청년 농업인들로부터 공수한다고 했다. 그들의 ‘정착’을 돕기 위해서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귀농해 땅을 임대받아 경작하면서 수익을 만들어가는 친구들이 많아요. 처음에는 판로도 없죠. 청년 농업인들이 자리를 잡아야 농촌과 전통 장도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김씨는 더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뒤늦게 식품영양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식품에 대한 전문 지식 없이 장을 만들다 보니 점점 한계에 부딪히는 걸 느꼈고, 과학적인 이유나 근거를 몰라 시야도 좁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사람들이 정말 원하는 장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다고 했다. 전통 장의 원형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인의 입맛에 맞춘 제품을 개발하는 것이 현재의 목표. 마지막으로 김씨는 새로운 도전을 앞둔 청년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가끔은 무모한 게 좋을 때가 있어요. 세상의 속도에 자신을 맞추지 말고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살피면서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박주원 이가림 인턴기자 onlinenews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