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제주시 농협 동문지점에 2억원을 수표로 인출해 달라며 고객이 찾아왔다. 고객은 주택 구입 자금으로 쓸 예정이라고 말했지만, 창구 직원은 단번에 보이스피싱 미끼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직원의 거듭된 만류에도 고객은 돈을 찾아 돌아갔다. 직원도 포기하지 않았다. 귀가한 고객에게 연락해 보이스피싱이 의심된다며 끈질기게 설득을 이어갔다. 결국 고객은 찾아간 돈을 보이스피싱 조직에 건네지 않았고, 2억원이란 큰 돈을 지킬 수 있었다.
지난 10일에는 제주시 농협 본점에 대환대출을 진행하기 위해 돈을 이체해야 한다며 한 고객이 내방했다. 직원은 고객이 대환대출에 필요한 자금을 은행이 아닌 개인 계좌로 송금하려는 점을 수상하게 여겨 직접 거래 상대방과 통화를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직원과 고객은 대환대출이 보이스피싱임을 알게 됐고, 500만원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제주에서 보이스피싱 피해가 줄지 않고 있다.
제주경찰청에 따르면 도내 보이스피싱 발생 건수는 2021년 514건·2022년 409건·2023년 387건으로 나타났다. 이 기간 범죄 피해액은 105억원·116억원·107억원으로 매년 100억원이 넘는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검거 건수는 2021년 226건·2022년 150건·2023년 295건으로, 피의자를 잡지 못한 경우도 상당하다.
수법은 나날이 교묘해지고 있다.
예전에는 국세청 등 공공기관을 사칭해 피해자를 현금지급기 앞으로 유도하는 방식이 많았다. 최근에는 피해자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사전에 입수한 개인정보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실제 지난해 6월 제주에선 통신판매업을 운영하면서 470명이 넘는 외국인 명의로 가입신청서를 위조해 불법으로 휴대전화 유심칩을 개통한 뒤 보이스피싱 조직에 개당 20만원을 받고 판매한 30대 업자가 구속됐다.
같은 달 제주에선 해외에서 건 인터넷 전화번호를 ‘070’ ‘010’ 등 국내 전화로 바꿔주는 변작 중계기를 설치해, 불특정 다수에게 미끼 문자를 보낸 일당이 경찰에 검거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제주에선 금융기관 등의 협조를 통해 보이스피싱 의심 사례를 사전에 발견해 막은 건수가 63건이나 됐다. 은행 직원의 기지로 막은 피해액은 15억원에 달했다.
제주경찰청은 21일 보이스피싱 피의자 검거 및 피해 예방에 기여한 금융기관 직원 4명에게 감사장과 공로자 보상금을 수여했다. 주인공은 제주시 농협 동문지점 정옥선 팀장과 조홍필 지점장, 제주시 농협 본점 양은주 과장과 박하정 계장이다.
김수영 제주경찰청장은 “보이스피싱 범죄 대응에 모두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며 “많은 관심을 갖고 피해를 예방한 금융기관 직원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설 연휴를 앞두고 연말정산 조회, 명절‧상품권 택배 배송 등을 사칭한 스미싱 문자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