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차내고 아이 등교시켜”…과격한 한남동 집회에 초등학교 학생·학부모 몸살

입력 2025-01-14 17:25
14일 서울 용산구 한남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하교하고 있다. 최현규 기자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 학교 학생과 학부모가 연일 계속되는 집회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관저 주변에서 열리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 찬성 및 반대 집회에서 발생하는 소음뿐 아니라 일부 격앙된 시위 참여자의 비속어와 혐오 발언으로 험악한 분위기가 고조된 탓이다. 학생들 교육 환경에 악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안전을 위협하는 환경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학교 주변 집회에 대해선 소음 규제 등을 강화하는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난 13일 오후 1시쯤 찾은 한남동 서울한남초등학교는 방학기간이어서 정규 수업이 열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학생 100여명이 돌봄교실과 방과후학교 등을 다니고 있어서 학생들 통행이 끊이지 않는다. 학교 주변으로는 주로 3곳에서 집회가 진행된다. 학교 정문으로부터 300m쯤 떨어진 서울 지하철 6호선 한강진역 일대엔 보수 단체의 집회가 열린다. 정문에서 200m쯤 떨어진 곳에선 진보 단체의 집회가 진행된다.

이들 2곳이 주요 집회 장소인데 학교 정문에서 불과 50m 떨어진 곳에서도 소규모로 탄핵 반대 집회가 열린다. 이 집회에선 한강진역 일대 집회 장면을 현장음과 함께 생중계한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집회가 이어지면서 학교 주변은 내내 소음이 끊이지 않는다.

14일 서울한남초등학교 정문 앞에 학생들의 안전한 등하교를 위한 경찰통제선이 설치되어있다. 최현규 기자

학교 주변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학교 정문은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학부모들과 학생들이 학교를 오갈 때만 잠시 정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교사가 문을 열어주면서 외부인 출입을 막고 있었다.

정문 앞에는 형광 조끼를 입은 기동대 경찰 5명이 차량과 인파를 관리하고 있었다. 학교 담벼락에는 ‘우리 아이들 배움 위해 소리는 낮춰주세요’ ‘우리 아이들 위해 통학로는 지켜주세요’라는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지난 13일 서울 용산구 한남초등학교 정문 앞 거리에 집회 참가자들이 몰려 있다. 일부 참가자들이 골목에서 담배를 피면서 정문 앞으로 담배 연기가 흘러 들어왔다. 최원준 기자

일부 집회 참가자들은 정문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집회 관계자들이 현장 관리에 애를 쓴다고는 했으나 주변에는 쓰레기와 담배꽁초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흡연하는 시위 참가자들에게 경찰이 자리를 옮겨 달라고 요구하는 모습도 보였다.

학부모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올해 2학년 되는 학생을 둔 30대 여성 이모씨는 “지난주엔 학교 바로 앞으로 지금보다 사람이 더 많았는데 경찰이 등교 차량을 위해 길을 터 달라고 부탁했는데도 아무도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며 “결국 아이 손을 잡고 인파를 뚫으며 걸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불안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아이가 방과후학교만 다녀서 그나마 오후에 학교를 다니는데, 돌봄교실도 다녀야 해서 오전부터 아이를 학교에 보내야 하는 집도 있다”며 “그런 학부모들이 지금 제일 곤란해하고 있다”고 했다.

불만이 커지고 있지만 집회를 통제할 뾰족한 방법을 찾기는 어렵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에 따르면 학교 주변으로 집회가 신고돼 학습권이 뚜렷하게 침해될 우려가 있는 경우 관할 경찰서장은 시위를 금지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학교 주변 집회를 전면 금지하는 의무 조항이 아니다.

집회의 자유를 중시하는 판례도 있다. 금속노조는 2014년 5월 27일 경찰청 맞은편으로 집회 신고를 냈다. 하지만 이틀 뒤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인근 이화여자외고의 학습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며 집회 금지 처분을 내렸다. 이에 금속노조는 서울행정법원에 옥외집회 금지 통고처분 취소소송을 냈고, 이듬해 4월 법원은 금속노조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집회 신고 장소가 학교 주변 지역으로 볼 수 있지만, 학습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학교 주변 지역을 모두 집회금지구역으로 설정하게 돼 집회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했다.

14일 서울 한남초등학교 정문 앞에 탄핵 반대 종이 팻말이 붙어 있다. 최현규 기자

문제는 학교 인근 집회가 폭력성을 띠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지난 9일 서울한남초교 앞 집회 장소에선 스크린을 통해 연단에 올라온 연사의 험한 비속어가 그대로 생중계됐다. 13일도 마찬가지였다. 학교 주변엔 ‘사형’ 등 격한 문구들이 적힌 팻말과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14일 오전엔 홀로 등교하는 학생에게 한 집회 참가자가 말을 걸자 학생이 서둘러 정문으로 들어가며 피하는 모습도 보였다.

지난 10일 오전 11시쯤에는 4학년 자녀 손을 잡고 하교하던 40대 여성 김모씨가 “아이가 교실에서도 욕이 다 들린다고 한다. 길에서도 시위 참가자들이 큰 목소리로 고함을 쳐 무서워해 며칠간 반차를 내고 하굣길을 같이 한다”고 하소연했다.

이씨도 “지난주에 방과후학교를 다녀온 아이가 너무 시끄럽고 무섭다며 울먹여 사흘 동안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며 “일반적인 집회면 모르겠는데, 주변 집회가 너무 격해서 도저히 아이를 혼자 등교시킬 수가 없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학교 앞 집회에 대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집회 시위의 자유가 우선시돼야 하는 것은 맞지만 현재 학교 주변은 혐오 발언이 오가는 집회에 무방비 상태”라며 “스쿨존 제도를 도입했던 것을 집회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행법으로 학습권을 완전히 보장할 수 없다면, 시행령이나 시행규칙 등을 개정해서라도 거리와 소음기준 등을 새롭게 규제해 아이들의 정서를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원준 기자 1j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