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예나(가명·38)씨는 6년 전 임신중절(낙태) 수술 당시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고 했다. 3년간 교제한 남자친구와의 사이에서 뜻밖에 임신을 했는데 이 사실을 알리자 갈등이 시작됐다. 남자친구는 재정적으로 결혼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며 낙태를 요구한 것이다.
혼전임신 후회, 죄책감으로 자살 충동까지
한씨는 8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진지한 만남 중이었는데 남자친구의 책임감 없는 태도에 배신감을 느꼈다”며 “임신을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아기를 먼저 낳고 결혼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친의 태도를 보고 결혼할 수 있을지 혼란스러웠다”고 회고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한씨는 혼전 임신에 대해 후회하며 회개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은 수습해야 했다. 남자친구의 강경한 요구로 그는 임신 8주 차에 낙태 수술을 했고, 결국 남자친구와도 이별했다. 한씨는 “한국 사회에서 미혼모로 사는 게 무서워 낙태할 수밖에 없었다고 스스로 합리화하지만, 낙태의 상처는 깊었다”며 “무엇보다 죄책감으로 괴로웠다. 우울증이 심하면 자살 충동까지 느낀다. 평생 누구에게도 말 못 할 비밀로 남아있어야 할 듯하다”며 울먹였다.
엄마와 태아에 치명적 상처 입히는 낙태
송민희(가명·68)씨는 정부가 산아제한 정책을 펼치던 시절 두 번의 낙태를 경험했다. 송 씨도 낙태의 선택으로 평생 죄책감과 우울증으로 고통받았다. 송씨는 “우울증이 심할 경우 가슴이 막히고 종이 한 장조차 들 수 없을 만큼 무기력했다”며 “죄책감에 사로잡혀 다른 아이를 낳아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출산하지 않겠다는 어리석은 결심까지 했었다”고 전했다. 낙태로 부부 사이의 갈등이 끊이지 않기도 했다.
신앙 안에서 지난날을 회개하며 조금씩 치유를 경험한 그는 현재 낙태의 심각성을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송씨는 “낙태는 엄마와 아이 모두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 자궁은 전쟁터가 되고 태아와 엄마의 몸과 마음 모두 망가진다”고 했다.
자궁유착 제거 수술, 불임 치료도
낙태는 여성에게 정신적인 아픔뿐 아니라 육체적 후유증까지 남긴다. 20대 초반 남자친구와의 관계로 임신한 뒤 낙태한 최민아(가명·23)씨도 낙태의 대가를 온몸으로 겪었다. 최씨는 낙태 수술한 지 6개월 뒤 자궁 유착 진단을 받았고 이로 인한 수술을 했다. 하지만 수술 후에도 자궁 내막이 회복되지 않아 불임 치료까지 했다. 최씨는 “낙태가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칠 줄 몰랐다”며 “낙태 후유증은 단순히 육체적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그 선택이 현재 삶도 흔들고 있다”고 말했다.
앞선 사례들은 낙태한 여성들이 당면한 씁쓸한 자화상이다. 2022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에 따르면 여성들이 낙태 후 자궁유착증, 습관성 유산 등 신체적 증상을 겪는 경우는 7.1%, 죄책감과 자살 충동 등 정신적 증상을 경험한 경우는 59.5%로 조사됐다. 또 낙태 관련 정책에 대해 국가가 해야 할 과제로는 ‘원치 않은 임신을 예방하기 위한 성교육 및 피임 교육’(24.2%), ‘피임·임신·출산에 대한 남녀 공동 책임 의식 강화’(21.5%) 등의 순서로 나왔다.
낙태 상담하는 중학생 증가
김성옥 1549임신상담출산지원센터 국장은 6년간 이어진 낙태법 공백의 심각성을 지적했다. 김 국장은 “2~3년 전만 해도 성 경험이 있는 청소년은 주로 고등학생이었는데 최근엔 중학생들까지 포함된 분위기”라며 “이들은 성관계 후 임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상담센터를 찾는다. 법의 부재로 낙태에 대한 경각심이 떨어지는 현 상황이 안타깝다. 특히 청소년 성 문화 개선과 함께 낙태 예방을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회개와 치유, 회복 과정 지원해야
생명운동연합 대표 김길수 목사는 “낙태 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나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을 위해 치유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며 “교단 차원에서 생명존중위원회 등의 부서를 조직해 상담과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회개와 치유, 회복의 과정을 지원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아영 김수연 기자 sing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