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이전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그리스어 ‘아가페’는 라틴어로 ‘카리타스’(애덕)라고 번역됐다. 이를 ‘사랑’으로 번역한 건 영국 신학자 윌리엄 틴들이다. 이 일로 틴들은 당대 최고 지성인 토머스 모어의 날 선 비판을 받는다. 사랑이 “저잣거리에서나 쓰는 말”이란 이유였다. 그러나 문어(文語) 대신 범속한 구어(口語) 사용을 고수한 틴들의 번역 원칙은 이후 전 세계 성경 번역의 대원칙이 됐다.
‘계급과 관계없이 모두가 문화를 누려야 한다’는 정신을 받든 종교개혁의 후예는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가 곳곳에 대학과 박물관, 공공도서관 등을 남겼다. 이 책의 저자인 메릴린 로빈슨(82)은 적잖은 미국 기독교인이 이런 역사를 망각하고 사회적 약자에게 교육·문화적 혜택을 확대 제공하는 걸 반대한다고 비판한다.
미국 소설가이자 영문학자인 로빈슨은 1980년 ‘하우스키핑’을 시작으로 40여년 간 5편의 소설을 냈다. 인간 본질과 기독교 가치에 천착한 그의 작품은 펜·헤밍웨이 문학상(1982)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2004, 2014) 퓰리처상(2005) 등을 수상하며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제3회 박경리문학상 수상자로 소설 5편 중 4편이 출간돼 국내 문학계에서도 꽤 친숙한 이름이다. 매해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작가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그의 애독자다.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는 ‘칼뱅주의’다. 아예 자신을 종교개혁자 장 칼뱅의 신학을 따르는 ‘칼뱅주의자’로 천명한다. 미국서 2016년 출간한 에세이집인 이 책 역시 칼뱅주의에 근거해 미국 사회와 교회의 문제를 우아한 필치로 다룬다. 특히 종교개혁과 청교도 운동의 의미를 재평가하며 미국인에게 “정신과 영혼을 지닌 모든 이, 특히 존중할 만하다고 여기지 않는 삶의 자리에 있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이들이 되자”고 당부한다.
책에는 이외에도 종교를 포함한 인문학과 과학 간 바람직한 관계를 다룬 ‘인문주의’, 미국의 정교분리 현실을 비평한 ‘각성’, 민주 사회 속 인문학 교육의 필요성을 논한 ‘쇠퇴’ 등 17개 글이 담겼다. 최근 미국 교회의 흐름을 살피며 이를 비판하는 내용도 있다. 정치 지향이 극단적인 근본주의 교회와 진보 성향의 ‘구 주류 교회’(미국 감리·루터교 등) 양측 모두를 향한 화살이다.
전자에게는 “‘성경주의자’를 자처하며 미국의 문화 전통을 담대히 옹호한다는 이들은 철석같이 자기가 옳다고 믿으면서 어처구니없게 총기 구비를 부추긴다.… 이들의 행동을 뒷받침할 구절을 성경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한다. “기독교는 본질상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는 식별 도구를 거부한다”며 타인을 편리하게 악마화하는 ‘기독교 민족주의’를 향해서도 쓴소리를 던졌다.
후자를 향해서는 “이들 교회는 관용과 이상주의 등 기독교 사상과 역사를 가르치는 일을 저버려 교인들이 제대로 된 목소리를 갖지 못하게 했다. 그 결과 젊은이들은 기독교를 무지의 온상으로, 인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긴다”고 꼬집었다. 또 “성경 속 신화적 요소를 고민하던 이들은 오래된 독일 학자의 논의를 덮어놓고 수용했다.… 요즘도 적잖은 이들이 기독교를 지적으로 건전하게 만들고 싶어 구약성서를 거부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성경과 전통에서 멀어진 이들의 흐름은 “미국 기독교에, 더 나아가 모두에게 재앙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성경과 고전, 역사의 언어로 미국 현실을 유려하고도 명확하게 짚은 책이다. 글이 미괄식이고 만연체인데다 각종 인용이 풍부해 곱씹어 읽어야 글의 진가를 파악할 수 있다. 그가 미국 기독교가 직면한 문제에 대안으로 제시한 건 ‘기도와 성찰’이다. “우리는 역사 위에서 살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애처로운 존재다.… 과거 회귀 흐름은 새롭지 않고 미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기도와 성찰이다. 끔찍했던 과거가 우리의 편견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진지하게 귀 기울여야 한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