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정치의 모델, 카터… “매일 매순간 신앙을 사용했다”

입력 2025-01-01 17:52 수정 2025-01-01 18:05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915년 조지아주 플레인스의 감리교 교회에서 주일학교 수업을 이끌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달 29일 10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신앙심이 깊은 사람으로 유명하다. AP통신은 1일(현지시간) 카터 전 대통령의 신앙을 조명하는 장문의 기사에서 카터는 신앙을 그의 모든 정치적 행위에 투영했고, 크리스천이 정치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보여주었으며, 그의 정치와 삶을 통해 “복음주의를 재정의했다”고 평가했다.

카터는 1976년 대통령 후보자 시절에 자신을 “다시 태어난 기독교인”이라고 소개하곤 해 호기심을 샀다.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익숙한 표현이지만 당시 언론이나 복음주의에 익숙하지 않은 유권자에게는 이질적인 말이었기 때문이다.

카터의 신앙에 대해 글을 많이 쓴 다트머스대의 랜달 발머 교수는 1970년대에 복음주의자는 문화적으로 소외된 존재였고 정치세력으로 형성되지도 않았다면서 “누군가가 자신을 묘사하는 데 우리(복음주의자)의 언어를 사용하고, 그가 대통령 후보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된 후에 카터는 미국 외교 정책에서 인권을 증진시키고, 환경 보호를 옹호하며, 군사적 충돌에 저항했다. 또 미국의 탐욕과 소비주의를 비판했다. 퇴임 후에도 카터는 카터센터를 기반으로 세계의 평화, 민주주의, 공중보건을 위한 노력을 수십 년 동안 지속했다.

카터 부부의 오랜 친구인 질 스터키는 AP에 “그는 매일 매순간 신앙을 가지고 다녔고, 매일 매순간마다 신앙을 사용했다”고 회고했다.

카터는 정치를 하면서 두려움없이 자신이 신앙인임을 밝혔지만 자신의 정치를 위해 신앙을 이용하진 않았다.

카터에게 자문을 구하곤 했던 피트 부티지지 교통부 장관은 “성경을 거의 무기나 곤봉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보수주의자들이 많고, 자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신호를 필사적으로 보내기 위해 신앙을 사용하는 진보주의자들도 많다”면서 “카터 전 대통령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한 도구로 만들라는 신앙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정치에 신앙의 언어와 신념을 투영하는 카터의 사례는 세속적이고 다원적으로 나아가는 민주당에서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카터는 기독교에 특혜를 주지 않았다. 그는 “교회와 국가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분리”를 주장하며 종교 학교에 대한 공적 지원에 반대했다. 또 개인적으로 빌리 그레이엄 목사를 존경했지만, 그를 백악관 기도회에 초청하는 건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카터는 복음주의자였음에도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억압적 태도를 비판했고 인종과 여성, 성소수자의 권리에 대해 자유주의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주류 복음주의자들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였다. 교계 지도자들은 그가 종교를 버리고 세속적 인본주의의 길을 간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카터는 말년에 ‘진보적 복음주의자’로 불리게 됐다. 카터는 이런 호칭에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한 여성이 30일(현지시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다니던 조지아주 플레인스의 마라나타 침례교회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다. AFP연합뉴스

카터는 보수적인 신앙에서 출발했다. 남북전쟁 이전에 노예제를 지지하는 단체로 설립된 보수 교단인 남부 침례교에서 집사의 아들로 자랐다. 그는 아버지의 분리주의적 견해나 교단의 백인우월주의적 기원에 대해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가끔 세인트 마크 아프리카감리교회(AME)를 방문하면서 흑인 복음주의 전통을 접하게 됐다. 그의 아버지의 땅에서 일하던 소작농 가정들의 교회였다. 카터는 “그들의 예배에서 정신, 진정성, 열정을 볼 수 있었다”고 쓴 적이 있다.

수십 년 후 민권운동 기간에 조지아주 상원의원이던 카터는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 흑인과 백인의 통합 예배를 허용할 것을 촉구했지만 배척당했다. 1966년 주지사 선거에서 낙선한 뒤에는 “정치와 삶 전반에 환멸을 느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낙심한 그는 유명한 전도사이기도 한 여동생 루스의 권유로 펜실베이니아주와 매사추세츠주의 스페인어권 지역에서 전도 활동을 했다. 그는 당시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세속적인 삶에 자주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카터의 신앙은 나이가 더해가면서 평등과 소수자 인권으로 향했다. 카터는 76세에 남부 침례교에서 탈퇴하면서 교단의 지도부가 가정, 교회, 사회에서 여성을 남성에게 복종하는 존재로 비하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카터는 2018년에 출간된 그의 마지막 저서 ‘믿음(Faith)’에서 “예수와 여성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단 하나의 행위가 있을 뿐이다”라며 “예수는 여성들을 남성과 동등하게 대했는데, 이는 당시의 일반적인 관습과는 극적으로 달랐다”고 썼다.

카터는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서는 느린 변화를 보였다. 1976년 대통령 후보 시절 카터는 플레이보이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동성결혼을 허용해선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2021년 결혼 75주년에 즈음해서 동성결혼에 대한 정부와 교회의 승인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살해된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딸인 버니스 킹 목사는 카터를 “평화와 연민의 사람”이라고 정의하면서 그가 자신의 모든 책과 행사, 주일학교 수업에서 신앙은 단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말했다. 킹 목사는 “카터 전 대통령은 예수의 삶과 예수가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상호작용하는지 살펴보았다”며 “나는 카터 전 대통령이 리더로서 평생 ‘예수님이라면 무엇을 하시겠나?’ ‘사랑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무엇을 할까?’를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