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별세로 미국 정치 내 ‘진보적 복음주의(progressive evangelicalism)’도 사실상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전망이 나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밀착한 보수 백인 성향의 복음주의가 확산하면서 진보적 복음주의가 소외될 수 있다는 진단이다.
폴리티코는 30일(현지시간) “마지막 진보적 복음주의자 카터 전 대통령은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정신을 구현했지만 종교적 우파에 의해 가려졌다”며 “카터의 삶과 경력은 진보적 복음주의와 관련 없이 이해할 수 없다”고 보도했다.
폴리티코에 따르면 미국 내 진보적 복음주의는 남북 전쟁 당시 노예제도 폐지 운동으로 힘을 얻기 시작했으며 여성 인권 확대, 공교육 확산 등에 공헌해왔다. 소외된 이들을 돌보라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노예제 반대 투쟁으로 영향력이 정점에 달했던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은 20세기 초까지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여성 참정권 확대와 노동자 권익 신장 등을 강조하며 미국 대선에 민주당 후보로 3차례나 출마했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전 국무장관 등이 대표적이다. 1970년대 초반에도 베트남 전쟁 등에 반대하며 민주당 대선후보가 된 조지 맥거번 전 상원의원이 진보적 복음주의자의 명맥을 이어갔다. 맥거번은 감리교 목사의 아들이자 신학교 출신이었다.
카터도 1976년 대선 당시 인종 문제와 성 평등, 사회 정의 등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의 의제를 대거 수용했다. 폴리티코는 “카터의 승리에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이 결정적 영향을 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복음주의자가 그의 정책을 지지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카터가 1980년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에게 패배하면서 미국 정치 내 진보적 복음주의도 힘을 잃기 시작했다. 복음주의자들은 낙태와 종교기관 면세 혜택 문제 등으로 민주당과 멀어지면서 공화당과 밀착했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도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 등 복음주의자들은 트럼프 당선인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폴리티코는 카터가 정계 은퇴 뒤에도 평화와 정의 등 진보적 복음주의의 원칙을 추구했다며 “카터는 ‘지극히 작은 자'를 돌보라는 예수의 명령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마지막 진보적 복음주의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전했다.
한편, 카터의 장례식은 국장(state funeral)으로 오는 9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 있는 워싱턴국립대성당에서 엄수된다. 장례식에는 조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 빌 클린턴, 조지 부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등이 참석할 예정이라고 워싱턴포스트가 전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직접 추도사를 낭독할 계획이다.
카터 전 대통령의 시신은 조지아주 애틀랜타 소재 카터재단에 1차로 안치된 뒤 6일 항공편을 통해 워싱턴으로 이송돼 의회 의사당 중앙홀에 일시 안치될 예정이다. 공식 장례식 이후엔 고향 조지아주 플레인스에 묻힐 예정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또 국장이 치러지는 9일을 연방 정부 기관과 행정부 부처들의 임시 휴무를 결정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국가안보 등 필수 업무와 관련해서는 각 부처 수장이 재량에 따라 결정할 수 있다.
워싱턴=임성수 특파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