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잿물로 알려진 가성소다가 극심한 불황을 겪고 있는 석유화학 업계의 효자 역할을 하고 있다. 소금물을 전기로 분해해 얻을 수 있는 가성소다는 강한 염기성을 지니고 있어 과거엔 주로 섬유 염색이나 비누 제조에 쓰였다.
최근에 와선 배터리 소재·반도체 생산 공정에까지 활용되면서 몸값이 올랐다. 가성소다는 식품, 제지 등 다양한 전통 산업 분야에서 이미 활용처가 많았던 데다 전기차, 자원 재활용 등 미래 첨단산업과의 연관성도 높다. 이에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은 관련 투자를 적극적으로 집행하고 있다.
31일 시장조사기관 킹스리서치에 따르면 전 세계 가성소다 시장 규모는 지난해 496억1000만 달러(약 74조원)를 기록했다. 올해는 511억5000만(약 75조원) 달러를 찍을 전망이다. 향후 연평균 3.56% 성장하며 2031년에는 시장 규모가 653억6000만 달러(약 96조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가성소다는 현재와 미래를 모두 잡을 ‘캐시카우’로 화학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가성소다는 다양한 산업 영역에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일종의 세제 역할을 해왔다. 반도체 세정, 섬유 불순물 제거, 펄프·제지 표백 등에 쓴다. 강한 산성을 띠는 폐수를 처리할 때 염기성이 높은 가성소다를 투입해 산성도를 조절하기도 한다.
전기차 시장의 개화는 가성소다 수요에 불을 지핀다. 가성소다가 배터리용 양극재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데 쓰이는 동시에 양극재 원가 약 70%를 차지하는 전구체 재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통상 전구체 1t을 만들 때 0.9t의 가성소다가 투입되고, 배터리 용량 기준으로는 1GWh당 430t의 가성소다가 필요하다. IBK투자증권은 국내 가성소다 시장에서 전구체용이 차지하는 비중이 2022년 약 3%에서 오는 2028년 약 20%로 높아진다고 추산했다.
폐배터리에서 리튬, 니켈, 코발트, 망간 등을 뽑아낼 때도 가성소다가 쓰이는 만큼 관련 산업이 궤도에 오르면 가성소다의 쓰임새가 확장될 전망이다. 또, 전기차 경량 소재 제작에 쓰이는 알루미늄을 보크사이트 원석에서 추출할 때도 가성소다를 쓴다. 통상 전기차 한 대에는 기존 내연기관차보다 70kg 더 많은 알루미늄이 사용된다.
국내 화학 업계는 팔방미인 가성소다를 안정적인 이익 창출원으로 보고 투자에 팔을 걷어붙였다. 국내 가성소다 생산량 1위 한화솔루션(연 84만t)은 여수공장에 연산 27만t 규모의 가성소다 생산시설을 새로 구축해 2025년까지 연간 111만t의 생산능력을 갖출 계획이다. LG화학(연 71만t), 롯데정밀화학(연 35만t), OCI(연 11만t) 등 다른 화학업체들도 가성소다를 제조하고 있다. 가성소다는 한화케미칼 매출의 약 3분의 1, 롯데정밀화학 매출의 약 10%를 차지한다.
최근 가성소다 가격이 반등하면서 석유화학 불황 속 버팀목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ICIS에 따르면 지난달 동북아시아에서 거래된 가성소다 평균 가격은 t당 475 달러였다. 지난해 2월 t당 510달러를 찍은 이후 1년 9개월 만에 가장 높은 가격이다. 중국·중동발 공급과잉으로 가격이 폭락한 범용 석유화학 제품들과 대조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가성소다는 전기료가 원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며 “단기적으로는 산업용 전기요금 동결·인하가 장기적으로는 재생에너지를 활용한 저탄소 생산체계 구축이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황민혁 기자 ok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