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39대 대통령으로 ‘가장 위대한 전직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은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간) 별세했다. 향년 100세.
카터 전 대통령은 이날 조지아주 플레인스 자택에서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카터재단이 성명을 통해 밝혔다. 고인은 이날 오후 3시 45분쯤 별세했다고 미국 현지 매체 애틀랜타저널컨스티튜션(AJC)는 전했다. 장례식은 정치적 고향인 조지아주 애틀랜타와 워싱턴DC에서 열릴 예정이다.
1924년 10월 1일생인 카터 전 대통령은 올해 100세로 생존했던 미국 대통령 중 최고령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정치에서도 종교적이고 도덕적 신념을 구현하려고 했다. 지난 11월 미국 대선 당시 부재자 투표에 참여한 것이 마지막 공적 활동이었다.
카터 전 대통령은 피부암인 흑색종으로 투병해왔다. 지난해 2월부터는 치료를 중단하고 호스피스 치료를 받아왔다.
카터는 1924년 10월 조지아 플레인스에서 농부인 부친과 간호사인 모친 사이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해군 잠수함 부대에 복무했다. 부친이 사망한 뒤 조지아로 돌아왔다.
카터는 1962년 조지아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경쟁자가 부정선거로 낙마해 극적으로 의원직을 거머쥐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조지아주 주지사를 거쳤지만, 전국 정치에서는 무명에 가까웠다. 하지만 워터게이트 사건과 베트남전으로 정치 불신이 커진 상황에서 카터는 기성 정치인과는 다른 참신하고 도덕적인 모습으로 미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결국 1976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선출됐고, 현직인 공화당 소속 제럴드 포드 당시 대통령을 꺾고 39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재임 시절은 평탄치 않았다. 1970년대 후반 미국의 경기침체와 실업률 상승으로 카터의 지지율은 곤두박질쳤다. 도덕과 인권을 앞세운 카터의 외교 노선은 이란의 테헤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으로 실패했다는 박한 평가를 받았다. 재임은 1977년부터 1981년까지 단임에 그쳤다. 1980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에게 참패했다.
다만 카터가 주도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중동에서 평화의 주춧돌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카터는 1978년 9월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의 메나헴 베긴 총리를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로 초대해 협정체결을 주선했다. 이듬해 3월 양국은 적대행위를 종결한다는 조약에 서명했다.
한국과는 주한미군 철수 문제로 갈등을 겪기도 했다. 카터는 박정희 군사정권 당시 국내 인권 상황을 거론하며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대선공약으로 제시했다. 박정희 정권이 내정간섭이라고 반발하면서 한미 관계에 긴장이 고조됐다.
카터는 퇴임 이후인 1982년 카터재단을 설립해 국제 평화 문제에 천착했다. 1994년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를 선언하면서 북핵 위기가 불거지자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담판에 나섰다. 북한 외에도 에티오피아, 수단 등 국제 분쟁 지역에서 중재자로 활동해 2002년 노벨평화상도 수상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해비타트 프로젝트(사랑의 집짓기)’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카터는 재임 당시보다 퇴임 이후 더 활발한 활동을 해 ‘가장 위대한 전직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아내 로잘린 여사와의 순애보적인 사랑도 주목받았다. 1946년 로잘린 여사와 결혼한 카터는 2021년 7월 10일 결혼 75주년 기념식에서 아내에게 “(결혼생활 내내 내게) 꼭 맞는 여성이 돼 줘서 특별한 감사를 표하고 싶다. 정말 많이 사랑한다”고 말했다. 로잘린 여사는 지난해 11월 향년 96세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77년간의 결혼 생활이 끝났다. 부부 슬하에는 4남매가 있다.
카터 전 대통령의 아들 칩 카터는 “아버지는 나뿐만 아니라 평화와 인권, 이타적인 사랑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웅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형제, 자매와 저는 이러한 공통의 신념을 통해 아버지를 전 세계와 공유했다”며 “아버지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준 덕분에 전 세계는 우리의 가족이었다”라고 말했다.
워싱턴=임성수 특파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