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연말마다 이곳에 높이 세우는 이웃돕기 성금 모금 현황판 ‘사랑의 온도탑’은 색다른 모습으로 눈길을 끌었다.
온도계처럼 모금 목표액에 1% 가까워질 때마다 1도씩 올라가는 이 조형물 내부에는 카드 결제로 기부할 수 있는 키오스크와 즉석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공간이 ‘인터렉티브 체험 존’이라는 이름으로 설치돼 있었다. 이용자가 직접 뭔가 해볼 수 있는 공간이라는 의미다.
키오스크는 요즘 카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터치스크린 방식이었다. 음료를 주문하듯 안내에 따라 커다란 화면을 손으로 한 번 누른 뒤 무료로 즉석 사진을 찍거나 카드를 결제 단말기에 갖다대 2000원씩 기부할 수 있다.
기부 키오스크가 등장한 지 10년 가까이 됐지만 일부 시민은 아직 낯설어했다. 거리 기부라고 하면 현금을 모금함에 넣는 게 익숙한 세대일수록 그런 듯했다. 매달 일정 금액을 송금하거나 결제하는 정기 후원과도 다르다.
기부 키오스크로 모금에 참여한 대학생 이성은(22)씨는 “훨씬 간편한 것 같다”며 “요즘은 현금 들고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까 (이런 방식이) 이용하기 편리하다”고 말했다.
충남 천안에서 서울에 나들이를 왔다는 벨기에인 콜라드 스티브(51)씨는 “주로 TV 프로그램을 통해 기부에 참여하는 벨기에에는 이런 시스템이 아직 없다”며 놀라워했다. 국내 대형 항공사 기장으로 10년 정도 한국에 산 그는 “젊은 세대는 모든 걸 모바일로 하니 이들이 기부를 쉽게 할 수 있는 좋은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기부팝업’ ‘기부런’도 등장… 진화하는 기부
기부 형태가 사랑의 온도탑 같은 키오스크 기부, 팝업 형식을 빌린 ‘기부 팝업’ 등으로 다양해지고 있다. 모금단체들은 대면 접촉을 통한 현금 모금이나 정기 후원 호소에 머물지 않고 참여도를 높이기 위한 방법을 모색 중이다.기부 키오스크는 2015년 음료 프랜차이즈 스무디킹이 아동구호단체 세이브더칠드런과 함께 진행한 아프리카 아동 지원 이벤트 때 처음 선보였다. 광화문 사랑의 온도탑에 탑재된 건 올해가 처음이다. 지난해에는 5000원으로 네컷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부스만 설치했었다.
지난 12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몰에 마련된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조명가게’ 팝업스토어는 난치병 아동을 위한 기부를 테마로 꾸며졌다. 방문객이 체험존에 진열된 여러 메시지 카드 중 하나를 골라 글귀를 써서 전구 모양 장식에 넣고 대형 트리에 매단다. 한 명 참여할 때마다 디즈니플러스가 1004원씩 기부한다. 이 이벤트의 이름은 ‘세상을 밝히는 트리’다.
팝업 현장에는 1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기부에 참여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방문객들은 새해 소망을 적은 메모지를 전구에 넣은 뒤 트리에 걸었다. 이벤트 참여 후에는 트리와 함께 즉석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기부 참여자는 인증샷을 인화한 사진과 드라마 포토카드를 받을 수 있다.
팝업에 참여한 김시온(20)씨는 “지나가다 (팝업이 보여) 참여했는데 기부도 된다고 하니 뜻깊다”며 “현금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고 계좌이체가 어려운 분들도 쉽게 기부에 참여할 수 있어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인섭(31)씨도 “일단 기부에 참여하는 게 너무 간단해서 참여율이 높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참여 완료) 버튼을 누르면 기부 참여자 숫자가 올라가는 게 눈으로 보이니 내가 기부에 동참했다는 게 실감이 난다”고 소감을 설명했다.
달리기로 건강을 챙기면서 뛴 만큼 기부까지 되는 ‘기부런’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 4월 여의도 둘레길 코스를 달리면 장애인 및 운동 약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기부금이 적립되는 ‘기부런’ 행사를 열었다. 참가자당 840원을 적립하고 참여 인원과 누적 거리를 기준으로 ㎞당 100원씩 LG전자가 기부금을 냈다.
월드비전은 6㎞ 걷기·러닝 행사를 열어 참가비를 아프리카 아동 식수위생사업에 사용하는 ‘글로벌 6K’ 캠페인을 2020년부터 매년 진행 중이다. 깨끗한 물을 얻기 위해 매일 평균 6㎞ 걷는 개발도상국 아이들을 대신해 걷거나 달리자는 취지로 시작했다.
2020년 9월 월드비전 기부런에 참가한 전민주(24)씨는 “참가자에게 제공되는 이름표마다 기부되는 아이의 이름이 적혀 있어 뜻깊은 경험이었다”며 “이 계기로 정기 기부를 결정한 크루원도 있었다”고 전했다. 전씨는 “돈을 기부했다는 것보다 러닝이라는 하나의 콘텐츠를 즐기는 데 비용을 지불했다는 생각이 들어 거부감이 없었다”고 말했다.
‘개성’ ‘사회적 책임감’… 새로운 기부 문화 키워드
전문가들은 다양한 기부 형태의 등장이 기부 참여 활동으로 개성을 함께 드러내고 싶어하는 젊은 세대의 특징과 맞닿아 있다고 본다.노법래 부경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과거 기부는 불우이웃돕기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온정을 나누는 부분이 강했지만 현재는 각자가 지향하는 가치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며 “팝업스토어나 기부런은 이벤트 자체가 가치를 가짐과 동시에 본인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어 젊은 층에 특히 각광받는 게 아닐까 싶다”고 분석했다.
높아진 시민의식이 기부 형태를 다양하게 변화시키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연구소가 작성한 ‘2024 데이터로 보는 국내 기부 규모 변화’ 자료를 보면 2009~2015년 동정심이었던 기부 동기 1위는 2017~2023년 사회적 책임감으로 바뀌었다. 같은 시기 동정심은 2위로 밀려났다.
이영주 아름다운재단 연구사업팀장은 “5년 전만 해도 사람들에게 기부하는 이유를 물으면 단순히 불쌍한 사람을 돕고 싶다는 것이었지만 최근 2~3년 동안은 시민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함이라고 답한다”며 “그만큼 우리 사회에 시민의식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새로운 기부 방식도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줄어드는 기부…“혁신적 아이디어 필요”
기부 창구는 늘고 있지만 참여는 줄고 있다. 홀수 해마다 통계청이 실시하는 사회조사에서 기부 여부를 묻는 질문에 ‘예’라고 답한 사람은 2021년 21.6%, 지난해 23.7%였다. 2011년 36.4%, 2013년 34.6%였던 것에 비하면 크게 감소한 수치다.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이달 24일 기준 전국 모금액은 3026억6000만원이다. 내년 1월 31일까지 진행되는 모금 목표액 4497억원의 67.3%에 그친다.
기부 참여가 줄어든 데는 호주머니 사정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통계청 사회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기부하지 않은 이유로 ‘경제적 여유 부족’이 가장 많은 46.5%를 차지했다. ‘기부에 관심 없음’이 35.2%, ‘기부단체 불신’이 10.9%로 뒤를 이었다.
사랑의 온도탑 앞에서 만난 이아람(39)씨는 “기계를 활용해 기부하니까 현대화를 체감한다”면서도 “아무래도 경기가 좋아져야 기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경기가 침체되면 기부 효능감이 줄어든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했다. 기부하더라도 사회가 나아지고 있다는 효과를 체감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노법래 교수는 “기부 액수가 작더라도 기부 자체가 굉장히 의미있게 쓰일 수 있다는 부분이라던지 모금 단체의 긍정적인 이미지가 지속해서 노출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금전적 기부를 넘어 다양한 플랫폼과 정보 기술을 활용한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노 교수는 “봉사를 하면 한 만큼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거나 지역 화폐로 전환해주는 타임뱅크의 형식을 빌리는 등의 아이디어가 필요하다”며 “기부 키오스크도 시각적인 부분을 더 개발해 매력적인 인터페이스를 고민하면 어떨까 싶다”고 말했다.
김동환 박상희 인턴기자 onlinenews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