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도 맨손으로 일해요”… 추위와 싸우는 야외 근로자들

입력 2024-12-27 06:02
서울의 한 지하철역 출구 앞에서 남성이 맨손으로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다. 이경민 인턴기자

서울 최저기온이 영하 5도까지 떨어진 지난 23일 오후 5시. 두꺼운 옷차림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사이로 전단을 내미는 이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강남역 4번 출구에서 만난 A씨(65)는 “손이 너무 시려 장갑을 끼고 싶지만 전단을 한 장씩 나눠주려면 어쩔 수 없다”며 꽁꽁 언 손을 내보였다.

겨울이 시작되면서 야외 근로자들이 추위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최근 5년간 한랭 질환으로 발생한 산업재해자는 44명이다. 특히 이들 중 70.5%는 야외에서 일하다 사고를 당했다. 거리에서 추위에 노출된 근로자들의 근무 환경이 한층 열악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줄지 않는 전단지… 겨울은 두 배로 춥다
지난 23일 강남역 4번출구 앞 모습. 퇴근하는 시민들이 추위에 걸음을 서두르고 있다. 이경민 인턴기자

전단 배포 아르바이트생에게 겨울은 가장 힘든 계절이다. 날씨가 추워지면 전단을 받는 사람의 비율이 급감하기 때문이다. A씨는 “10명 중 2~3명만 전단을 받아간다”며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아 다른 때보다 적게 나눠줄 수밖에 없다”고 겨울철 작업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A씨에게 할당된 전단은 총 300장.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이날은 정해진 개수를 모두 배부해야 퇴근할 수 있다. 배부 속도가 예상보다 더뎌지자 A씨는 가방에서 휴대용 스피커를 꺼내 최신 유행곡 메들리를 틀었다. 신나는 노래로 거리 분위기를 띄우려 했으나 시민들의 발걸음을 붙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신논현역 4번 출구에서 전단을 배부하는 B씨(67·여)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B씨는 “행인들에게 눈을 마주치며 말을 걸지만 안 받아줄 때가 많다”면서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치다 보니 전단에 손가락을 베인 적도 있다”며 “추위에 손 감각이 무뎌진 탓에 상처가 난 것도 나중에 알았다”고 했다.

평소 고혈압을 앓는 B씨는 올 겨울이 더욱 두렵다. 나이와 지병이 있어 추위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B씨는 “날씨가 추워지면 아픈 곳이 생긴다”며 “모자와 마스크로 견디고 있지만 한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일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걱정”이라고 했다. 시급 1만원 정도 일이지만 B씨는 이 돈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그는 “몸이 힘들어도 어쩔 수 없다. 일하지 않으면 당장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돈이 없다”고 덧붙였다.

산업안전법, 한파는 예외?
최저기온 영하 5도를 기록했던 지난 23일 서울 강남구 모습. 작업자들이 도로 보수 공사를 하고 있다. 이경민 인턴기자

거리 곳곳에서는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도로 보수 공사를 하던 작업자는 눈에 젖은 낙엽을 밟고 크게 휘청거렸고, 야쿠르트 판매원은 언 땅에서 카트를 밀며 아슬아슬한 모습을 보였다.

인근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김모(54)씨는 “추운 건 견딜 수 있지만 큰 사고로 이어질까 봐 항상 긴장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사다리에서 발을 헛디뎌 크게 다쳤다. 추위로 몸이 둔해져 순간 중심을 잃은 탓이다. 김씨는 “손발이 얼지 않도록 핫팩을 쓰지만 직업 특성상 두꺼운 옷을 껴입기 어려워 한계가 있다”고 덧붙였다.

한 야외 근로자가 트럭에서 물건을 내리고 있다. 이경민 인턴기자

산업안전보건법은 한랭작업 근로자에게 방한용품과 휴게시설을 제공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법에서 정의하는 한랭작업은 주로 냉동고나 제빙고 등 특정 환경에 국한돼 있다. 야외에서 한파에 노출되는 근로자들은 보호받기 어려운 실정이다.

취재진이 만난 야외 근로자들 중 별도 휴게시설에서 쉬는 이는 없었다. A씨는 “추운 날엔 지하철 역사나 인근 건물 계단에서 잠시 몸을 녹이는 게 전부”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한파로 인한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법적 근거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법에 상세한 내용이 없으면 관계자들이 이를 모르고 재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며 “행정규칙을 제정해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적극적으로 홍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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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민 인턴기자 onlinenews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