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여야 정치권이 각자의 이해관계에만 충실한 법리적 해석을 내세워 소모적인 공방을 벌이면서 탄핵 정국에 대한 국민적 갈등과 혼란만 부추긴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통령이 헌법재판과 수사에 임하는 태도, 헌법재판관 추가 임명을 둘러싼 여야의 갈등, 대통령 권한대행의 권한 범위에 대한 주장들과 탄핵 추진 등 다양한 부분에서 당리당략에 따른 이기주의와 남탓, 전례를 뒤집는 모순적 행보가 드러난다. 국가적 위기의 해결이나 평온한 민생보다 정치적 양극화만 부추겨지는 모양새인데, 비상계엄 사태가 어떤 식으로 일단락되든 사회 분열 문제가 큰 과제로 남게 될 전망이다.
“권력에 굴하지 않는 법 집행” 말했던 대통령
윤 대통령은 25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출석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이 공수처의 출석 요구에 응하지 않은 것은 지난 18일에 이어 두 번째다. 윤 대통령 측 석동현 변호사는 지난 24일 기자들과 만나 “내일 출석하기는 어렵지 않나 보고 있다”고 말해 두 번째 출석 요구에도 불응할 방침임을 이미 예고했었다. 향후 수사기관의 조사에도 응하겠지만, 그보다는 헌법재판소 재판관들 앞에서 비상계엄에 대한 입장을 먼저 공개적으로 밝히겠다는 것이 윤 대통령 측의 설명이다.
현직 대통령 수사 자체가 초유의 일인 만큼 절차적 특수성이 인정돼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다만 피의자가 조사 시기를 직접 결정하겠다는 투의 태도가 비판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윤 대통령이 모두에게 공정한 법 집행을 강조했던 검찰총장이었다는 점은 바로 이 대목에서 거론된다. 윤 대통령은 검찰총장 시절 “검찰이 살아 있는 권력에게도 굴하지 않고 법 집행을 해야 살아 있는 권력 또한 국민들에게 정당성을 받을 수 있다”며 “정권 차원에서도 엄정한 수사는 꼭 필요하다”고 했었다.
윤 대통령은 탄핵심판을 비상계엄 배경 설명의 장으로 인식하지만, 정작 헌재의 절차에도 적극적이거나 협조적이진 않은 모습이다. 헌재는 앞서 지난 24일까지 윤 대통령 측에 국무회의록과 포고령 자료를 제출토록 명령했으나, 윤 대통령 측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 측은 장외에서 “본격적 심리를 ‘6인 체제’에서 할 수 있는지 논쟁적 요소가 있다”고도 밝혀 헌재의 자격 문제부터 이야기했다. 물론 이에 대해 헌재는 재판관 6명으로 이번 탄핵심판의 심리와 결정 모두 가능하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법조계에서는 “대통령이 ‘법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실망스럽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윤 대통령은 헌재나 수사기관이 보낸 서류를 송달받지 않았고, 헌법재판 대리인단이나 수사 변호인단도 정식으로 선임하지 않았다. 고검장 출신 변호사는 “법치가 무너졌다며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정작 본인은 법치를 안 따르는 모습이 아니냐”고 말했다. 헌법연구관 출신 법조인은 “스스로 국가를 위한 행동으로서 정당하다고 주장했다면, 하루빨리 직무에 복귀할 수 있도록 신속하게 재판을 진행해 달라고 주장해야 맞지 않느냐”고 말했다.
헌재에서 기각 결정을 얻어 직무에 복귀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 2004년 3월 탄핵심판에 소추됐을 때 오히려 빠른 재판 진행을 원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변론조서를 보면 국회 소추위원 측은 변론기일을 총선 이후로 연기할 것을 주장했으나, 노 전 대통령 측은 “선거를 이유로 기일을 연기해 달라고 하는 것은 타당성이 없다”고 했다. 국회 소추위원 측이 많은 증인을 신청하자 노 전 대통령 측은 “절차의 낭비”라며 “재판부는 신속히 탄핵재판을 진행해서 대통령의 직무권한 정지라는 비상사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재판관 숫자와 거부권
윤 대통령의 중대한 법 위반 여부를 심판할 헌재의 재판관 숫자를 둘러싼 정쟁들도 퍽 소모적이다. 재판관이 꼭 9인이 돼야 하느냐의 문제는 8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 당시에도 크게 논쟁됐던 것인데, 당시와 비교하면 대통령과 국회 측, 여야 각 진영의 입장이 현재 묘하게 뒤집혀 있기도 하다. 물론 박 전 대통령 탄핵은 현 여권에서도 일부 찬성을 한 측면이 있어서, 윤 대통령 탄핵 반대가 당론이었던 현재와 단선 비교를 하긴 어렵다.
당시 박 전 대통령 측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재판관 1명을 더 임명해 8인이 아닌 9인으로 심리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전 대통령 측은 “헌재의 구성부터 완결해서 공정성 시비를 원천적으로 차단해야 한다” “이를 게을리하면 재판이 재심 사유에 해당한다” “이 재판에 관여한 이들은 역사의 죄인이 된다”고까지 했다.
8년이 흐른 지금은 윤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는 여당이 재판관 추가 임명에 미온적이다. 윤 대통령의 파면을 촉구하는 야당은 현재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을 향해 공석인 3인의 재판관을 빨리 채울 것을 촉구하고 있다. 다만 현 야당 의원들 중에도 박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 당시에는 황 권한대행에게 재판관 임명 권한이 없다고 주장한 이들이 있었다. 이는 결국 지금의 헌재가 6인 체제로 심리를 할 경우 단 한 명의 재판관만 기각 의견을 제시하더라도 윤 대통령이 파면을 피하는 데서 빚어진 현상이다.
야당은 여당을 향해 헌재 재판관 공석을 채워넣는 것이 국가적 대사를 해결할 원칙에 부합한다고 강조한다. 여당은 야당을 향해 그간 ‘6인 체제’를 만든 주범이 야당임을 지적한다. 대통령의 파면 이후에는 권한대행의 임명권이 있다느니, ‘대통령 지명’ 몫이 아닌 다른 재판관의 경우에는 권한대행이 임명할 수 있다느니 하는 이론들도 뒤따른다. 모두 한편으로는 필요한 법리적 공방이겠으나 국민적 관심과 거리가 있는 지엽적 문제에 매달리는 격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출구 없는 대치의 탄핵 정국
정치적 타협이나 해결 없이 사법적 판단에 운명을 거는 탄핵 정국은 계속되기만 한다. 한 권한대행이 내란·김건희 여사 특검법과 헌법재판관 임명 문제와 관련해 “여야가 타협안을 갖고 토론하고 협상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요청하자 민주당에서는 “내란을 지속시키겠다는 것”이라는 말과 함께 탄핵 착수가 선언됐다. 민주당은 애초부터 한 권한대행의 특검법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 시 탄핵 절차에 돌입할 뜻임을 밝혀 왔다. 국민들은 이제 대통령 권한대행의 직무가 정지된 이후에는 누가, 또 그 다음에는 누가 권한을 이양받는지 공부하듯 하고 있다.
한 권한대행이 만일 특검법에 대한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하더라도 전례가 없던 일은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직무정지 당시인 2004년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은 사면법 개정안 등에 두 차례 거부권을 행사했었다. 이황희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고건, 황교안 전 권한대행 당시 문제 없이 인정됐던 권한들에 대해서는 이번에도 존중해야 한다”며 “문제가 된다면 이후 권한대행과 관련한 법 규정을 새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이 혼란의 와중에서 국민들은 ‘민주당이 앞으로 집권당이 될 것인가, 대통령 선거에서 새 정부를 만들 것인가’를 판단한다”며 “숫자의 힘을 믿고 계속 힘으로 몰아친다면 어떤 국민이 좋아하겠느냐”고 말했다. 김 전 의장은 “상대방을 포용하지 못하는 정치는 바람직하지 않은 정치”라며 “이재명 대표가 ‘수습할 책임은 우리 민주당에도 있다’는 식으로 나오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비상계엄 이후 한국사회의 고질병인 정치적 극단화는 심화되고 있고, 향후에도 각 진영은 서로를 존중하지 않은 채 각자의 맹목적 주장만 되풀이할 것으로 보인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정치가 모두 진영화되다 보니 중립지대가 사라지고 있다”며 “네편 내편을 떠나 의견을 들을 만한 사람이 없어지는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