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정사립학교법이 지난 4월 1일자로 시행됐습니다. ‘어떤 사립학교든 정부 인가 없이 운영할 수 없다. 종교 교육과 종교 의식을 배제해야 한다.’ 조선에서 주어지는 선택지는 ‘순응해라 그렇지 않으면 문 닫아라’입니다. 탄압입니다.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습니다.”(1915년 7월 13일)
미국 북장로교 파송 제임스 E 아담스(한국이름 안의와·1867~1929) 선교사는 아서 브라운 선교사에게 이같이 편지로 전하며 “전후 모든 상황이 저희로 하여금 끊임없이 기도하게 만든다. 어떤 수단이 됐든 간에 ‘하나님의 권능’을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기독사학을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는 안의와 선교사의 모습은 오늘날 종교 교육의 자율권 침해 문제로 사학법 재개정을 논의하는 한국교회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안의와 선교사의 1910년 이후 선교 활동상을 기록한 편지와 기고문 등이 새롭게 발굴·공개됐다. 1895년 6월부터 1922년 6월까지 기록된 편지에는 조선에 대한 애절한 심정이 절절히 묻어난다. 근현대사 주요사건인 1905년 을사늑약, 1910년 한·일 강제병합, 1919년 3·1 만세운동도 언급한다.
안의와(사진) 선교사는 1867년 미 인디애나주에서 출생해 1895년 부산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1896년 11월 대구선교 업무를 인계받고 부임과 동시에 대구·경북지방에 최초로 남문안교회(현 대구제일교회) 초대목사로 부임했다.
길거리에서 복음을 외치며 전도했던 안의와 선교사는 교육 선교에 특화된 인물이다. 최초로 대구선교부지를 중심으로 주일학교와 소학교, 중등학교 설립을 계획했다. 1906년 그는 계성학교를 시작하면서 학생들의 교육권을 보장하고자 노력했다. 전도와 교육을 통해 대구 경북지역 기독교가 급속하게 성장하도록 만든 밑거름이었다.
안의와 선교사는 1910년 국권침탈 당시 “일본의 점령으로 인해 나타나는 한 가지 결과로 한국인들에 대한 사업의 압박이 이전보다 훨씬 커지고 있다”며 “교회 모임에서도 그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럼에도 안의와 선교사는 교육 선교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선교연합공의회 교육평의회 사무총장, 교단 집행위원회 총무 등으로 활동하며 기독학교의 정체성을 존립하려고 노력했다.
“선교 교육은 교회 안에 기둥들을 세우는 과정입니다. 젊은이들이 가장 잠재력 높은 시기에 그들을 받아들여서 일련의 기간 동안 저희의 손으로 그들을 돌봅니다. 신앙 속에서 그들을 만들어 가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확장해 주는 것입니다.”(1913년 1월 29일)
1918년 건강 악화로 사임했던 안의와 선교사는 1920년 9월 대구에 다시 돌아와 선교 활동을 재개한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건강을 회복하지 못해 곧이어 은퇴하게 된다. 이때의 감정을 편지에 담아내기도 했다.
“지난겨울에도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의사들은 내게 그곳(대구)에서의 일을 완전히 끊고, 다시 돌아갈 생각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1922년 4월 3일)
안의와 선교사는 조선과 멀어졌지만, 복음이 꽃필 수 있도록 전 재산을 기탁해 ‘아담스복음전도재단’을 설립했다. 이는 대구에 66곳, 안동에 7곳 교회를 개척하는 계기가 된다.
이번 자료를 연구한 채승희 영남신학대 역사신학 교수는 18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그의 편지에는 한 영혼을 사랑하는 구령(救靈)의 열정이 담겨 있다”며 “한국교회에 오래도록 남을 영적 동력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아래는 공개된 편지 일부.
“전쟁 기간 동안에는 특히 전쟁지역(한국 북부 지역)에서는 일제 강점으로 엄청나고 맣은 고통과 불의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이제 이 나라를 일본의 속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내정 문제에 있어서는 현지 조선의 정부에 전권을 주겠다고 공언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한국의 외교문제 만큼 내치도 거의 장악하고 있습니다.
여기 대구에서는 중학교 사역을 하루라도 빨리 개시해야 합니다. 경남과 경북을 아울러 1개교만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남도와 북도를 합쳐서 현재 그리스도인 신자 수는 4000명 선이고, 구역 성도 수도 급증하고 있습니다. 여기 주민들 사이에서 중학교와 같은 교육 기관에 대한 요구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들이 일본 학교들로 가고 있습니다.” (한국 대구, 1906년 12월 28일)
“일본의 점령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한 가지 결과로 한국인들에 대한 사업의 압박이 이전보다 훨씬 커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든 교회 모임에서도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한국 대구, 1910년 12월 20일)
“선교 교육은 교회 안에 기둥들을 세우는 과정이고, 젊은이들이 가장 잠재력 높은 시기에 그들을 받아들여서 일련의 기간 동안 저희의 손으로 그들을 돌보면서 신앙 속에서 그들을 만들어 가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확장해 주는 것입니다.”(한국 대구, 1913년 1월 29일)
“한국에서 선교회들은 다른 곳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교육을 최우선시한 적이 없습니다. 초기에는 복음 전파를 위해서 모든 것을 양보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 전파의 문이 상당히 개방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최근 몇 년간 이어지는 여건을 보면 내적인 여건은 물론 외적인 여건까지도 완전히 바뀌었고, 그 변화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정책 부분을 변경해야 하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6곳의 연합선교회들에 17만3391명의 영혼을 담당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는 얼마 전부터 2세대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여전히 성장 중입니다. 작년에 저희는 신앙을 고백한 1만 199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지난 4~5년 동안 저희는 예전 평화로운 시절에 저희 주이를 둘러쌌던 신앙적으로 애매했던 무리들이 저희를 떠났습니다.
합방 흡수 이후로 국민들의 전체적인 사회적 정신적 생활이 개조되고 있습니다.(중략) 변화가 강둑 무너지듯 이루어졌고 그런 여건들로 인해서 적응할 필요성, 특히 교육 노선들에서의 적응 필요성이 아주 시급하고 절박합니다. 머뭇거리면 밀려납니다. 일본식 제도는 독일도 능가하는데, 미국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사립 초등학교도 허가를 받아야 하고 꼼꼼한 감독을 받습니다. 비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교육은 더 많은 것을 좇아서 나아 가야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교육은 저희에게 주어진 것을 보전하는데 필요한 것입니다.”(한국 대구, 1914년 1월 10일)
“조선총독부에서 출간한 ‘합방 후 3년간 조선 통치 결과’에는 사립학교법 관련 선포 내용이 나옵니다.(중략) ‘종교로부터 교육을 독립시킨다는 원칙의 강행은 차후 도모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의 심각성은 명백합니다. 선교사들은 교육에서 신앙이 필수적이고 우위를 차지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교육에 관심 없습니다.”(한국 대구, 1914년 6월 5일)
“개정사립학교법이 지난 4월 1일 자로 시행됐습니다.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사립학교든 정부 인가 없이 운영할 수 없다. 종교 교육과 종교의식을 배제해야 한다.’ 조선에서 주어지는 선택지는 ‘순응해라 그렇지 않으면 문 닫아라’입니다. 탄압입니다. 한국 상황이 암울합니다.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종교와 분리하거나 학원사업을 접으라는 것입니다.
전후 모든 상황이 저희로 하여금 끊임없이 기도하게 만듭니다. 어떤 수단이 됐든 간에 ‘하나님의 권능’을 구해야 합니다. 여기 한국에서 이뤄지는 기독교적 교육을 위한 노력이 탄압받거나 비기독교화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고 믿습니다.(중략) 모든 힘을 다해 버틸 것이며,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고, 저희의 신앙을 세속화하는데 넘겨주지 않을 것입니다.”(일본 가루이자와마치, 1915년 7월 13일)
“제가 이곳에 도착한 직후에 한국에서 봉기(3·1 만세운동)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습니다. 교회의 참여와 관련해 언급한 내용은 대중적인 성격을 나타내기 위한 말이고, 대부분 국내가 아닌 국외에 있었던 내용이라고 저는 애써 생각하고 싶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박사님께서 알고 계신 내용을 알려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캘리포니아, 1919년 3월 28일)
“그곳(대구)의 상황은 절망에 가깝습니다. 사역의 양은 엄청나고 사역자의 수는 너무 많이 줄어든 상태입니다. 사실 저는 미국에서 잠깐 있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일할 예정입니다. 의사들이 이전처럼 사역을 무리하게 하면 안 된다고 줄곧 얘기했습니다.”(오하이오, 1920년 7월 19일)
“대구에 돌아온 지 3개월쯤 됩니다. 제 체력이 그다지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팀 사역자로 자신을 지켜나간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이 노정이 제게 너무 힘이 듭니다. 최소한 잠정적으로라도 사임하는 방법 외에 달리 방안이 없다는 결론입니다.”(한국 대구, 1920년 12월 7일)
“지난 겨울에도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의사들은 저에게 그곳(대구)에서의 일을 완전히 끊고, 미국으로 건너와서 안정을 취하고 다시 돌아갈 생각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굳이 가고 싶다면 완전히 회복되거든 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는 돌아갈 생각을 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필라델피아, 1922년 4월 3일)
김동규 기자 k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