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생 K는 자해, 공격적 행동을 자주 한다. 우울감이 심하고 엄마에 대한 분노로 말도 섞지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 엄마가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학대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엄마가 학대하지는 않지만, 자주 예전 기억이 되살아나 힘들다. 이 감정을 없애기 위해 자해하거나 물건을 던지고 부순다. 그러면 잠시라도 힘든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건을 부수면 잠시라도 화가 해소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불편한 생각이나 감정이 시작되면 이것이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여러 정서 과학 연구를 볼 때 이런 느낌, 감정, 생각은 평균 90초 지속하다가 다음 것이 올 때 없어진다. 이런 불편한 생각, 느낌에 대해 ‘왜 이런 나쁜 생각이 나지, 이런 감정이 들면 안 되는데, 이러면 나는 불행해질 거야, 이런 감정을 계속 느끼는 나는 멍청한 거야, 더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지, 한심해’라는 식으로 감정에 대해 평가, 판단한다. 그 때문에 불편한 감정이나 느낌은 계속 연장되는 거다.
역설적으로 부정적인 감정, 느낌을 없애려고 하는 모든 시도가 우리의 뇌에서 불편한 느낌을 지속시킨다. K도 엄마에 대한 기억, 감정이 떠오를 때마다 ‘이런 불쾌한 감정에서 빨리 벗어나야 해’라는 생각으로 자해했던 거다. 이런 불쾌한 감정도 알아차리고 구체적으로 이름 붙여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미국의 신경과학자 리버만은 강한 감정을 드러내는 얼굴 사진을 보여 주면서 MRI로 뇌 활동 변화를 보는 연구를 하였다. 참가자들은 그 사진을 보자마자 편도체가 활성화되었다. 하지만 참가자들에게 느끼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도록 요청했을 때, 편도체의 활동은 감소하고 전전두엽 피질의 활동은 증가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전전두엽이 활성화된다는 것은 그 감정에 의해서 우리가 지배받기보다는 감정을 우리가 지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즉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역량도 커지고 건강하게 행동할 레퍼토리도 다양해진다는 거다.
지금 여기서 각자 ‘과거에 자신에게 충격적이었거나 강한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켰던 사건을 구체적으로 떠올려 보고 그 순간에 잠시 머물러 보자. 이때의 감정에 대해서 먼저 “정말 충격적이고 엄청난 일이었어요”라고 막연하게 기술해 본다. 다음으로 “그 일을 겪었을 때 머리가 띵해지고 물속에 잠긴 느낌이었어요. 정말 막막하고 슬퍼서 절망적인 감정이 들었고 눈물이 마구 쏟아지려 했어요”라고 기술해 보자. 그리고 막연하게 감정, 느낌을 표현했을 때와 구체적으로 이름을 부여해서 표현했을 때의 차이를 비교해 보자. 감정을 구체적으로 명명하고 섬세하게 묘사할수록 ‘감정의 입자도’가 높다고 표현한다. 이렇게 감정의 입자도가 높을수록 감정의 근원에 대해 이해도도 높아지고 감정을 조절해서 자신에게 도움 되는 행동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여러 연구는 말해주고 있다.
K와 같이 예민하고 감정이 조절되지 않아 공격적으로 행동하거나 자기 파괴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대개 감정의 입자도가 낮은 편이다. ‘짜증 났어요’ ‘그냥 그 상황이 싫었어요’라거나 매우 불분명하고 막연하게 느낌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편이다. 또 감정에 잠시 머무를 틈도 없이 급하고 빠르게 감정에 반응하는 행동을 하는 편이다. K에게 부정적인 감정이라도 조금씩 그 감정에 머물러 보고 느낌을 살펴보면서 그 느낌에 구체적으로 이름 부여하고 표현하는 것을 먼저 시도해 보도록 하면서 치료는 시작되었다.
부정적 감정은 빨리 해소해야 한다는 생각은 상식처럼 사회에 만연해 있지만, 이는 진실이 아니다. 감정은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머무르고 명명해 주어야 한다.
이호분(연세누리 정신과 원장,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