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과거 집회 현장에선 ‘아침이슬’ ‘임을 위한 행진곡’ 같은 비장한 민중가요가 울려퍼졌다. 요즘 여의도 국회 앞에서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다만세)가 들려온다. 2016년 겨울 시민들이 손에 든 건 촛불이었지만 올 겨울 거리를 밝히는 건 형형색색의 야광봉이다. ‘최애’ 아이돌의 콘서트장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흔들던 야광봉을 사람들은 집회에서 흔든다.
집회 참가자들의 연령 폭 확대, 흥겨운 리듬, 의미 있는 노랫말에 힘입어 K팝 히트곡이 새로운 민중가요로 부상하고 있다. 최신곡뿐만 아니라 ‘다만세’처럼 발표된 지 10여 년이 지난 곡들도 집회의 의의에 부합한다면 줄줄이 ‘소환’되는 분위기다.
12일 음원 플랫폼 멜론에 따르면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난 3일을 기점으로 일주일(12월 3∼9일)간 소녀시대의 17년 전 데뷔곡인 ‘다만세’ 청취량은 직전 일주일(11월 26∼12월 2일)보다 23% 증가했다. 또 다른 음원 플랫폼 플로에서도 이 곡의 직전 주 대비 최근 일주일(12월 5~11일) 청취량은 48.3%, 청취자 수는 21.3% 늘었다.
SNS에서는 기성세대들이 배워야할 ’탄핵 플레이리스트’가 공유되고 있다. ‘다시 만난 세계’를 비롯해 데이식스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와 ‘웰컴 투 더 쇼’, 에스파의 ‘위플래시’, 블랙핑크 로제와 팝스타 브루노 마스가 부른 ‘아파트’, 지오디의 ‘촛불 하나’, 세븐틴의 유닛 그룹인 부석순의 ‘파이팅해야지’ 등이 이 목록에 있다.
최규성 대중음악평론가는 “촛불을 들고 집회에 나간 경험이 적고 기성세대의 민중가요와 접점이 없었던 MZ세대가 갑자기 닥친 비상 상황에서 익숙한 것들, 시청각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문화 요소들을 가지고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며 “촛불을 원형으로 하는 야광봉을 가지고 K팝을 부르며 하나의 응집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현상은 젊은 세대의 새로운 시위 문화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K팝과 각 팬덤의 야광봉은 젊은 층에게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는 의미도 가진다. 비상계엄 사태로 당연하게 생각했던 중요한 가치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낀 것, 그리고 이 요소들을 가지고 시위에 나선 것 사이에 연관성이 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외신들도 K팝이 하나의 시위 문화로 자리잡은 현상을 잇달아 분석했다. 영국 가디언은 “지난주 충격을 안긴 비상계엄 사태 이후 한국 전역에서 벌어지는 시위들은 K팝과 야광봉, 푸드트럭, 셀카 등에 힘입어 놀랍도록 축제같은 분위기를 띠고 있다”며 “특히 젊은 층은 각자의 팬덤을 의미하는 야광봉을 들고 셀카를 찍는 모습이 목격된다”고 이날 보도했다.
미국 빌보드는 “방탄소년단(BTS), 세븐틴, 블랙핑크 등 글로벌 슈퍼스타 덕분에 한국의 주요 경제 동력으로 부상했지만 K팝 산업은 일반적으로 정치와 거리를 둬 왔다”면서 “그러나 지금 시민들은 에스파의 ‘위플래시’에 맞춰 ‘윤석열을 탄핵하라’는 구호를 외치고, 지드래곤의 ‘삐딱하게’에 맞춰 깃발을 흔들고 있다”고 전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