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한 성산일출봉 분화구는 마을 소들의 월동지였다 [제주라이프]

입력 2024-12-11 17:42 수정 2024-12-15 14:04
성산일출봉 전경. 제주도 제공

“아우, 싫어. 손목 아파. 이러니 내가 맨날 병원 다니는 거잖아!”

배추 파는 아주머니가 손님을 향해 대뜸 소리를 내지른다. 진심인 듯 (아픈)손목도 내어 보인다. 그러면서 이미 손엔 칼을 쥐고, 배추를 뒤집어 심지를 네 쪽으로 가르고 있다.

옆에서 지켜보는 다른 손님은 다툼이 날까 가슴이 조마조마한데, 상인의 남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매대에 올릴 물건 다듬기에 정신이 없다.

지난 7일 제주민속오일시장은 김장철을 앞두고 채소 가게마다 문전성시였다.

“얼마예요?”
“해남 배추. 포기에 5000원.”

“대형마트는 3개 만원이라던데….” 한 손님이 말끝을 흐리자, 상인은 재빨리 비닐봉지를 펼치며 말을 얹었다. “이게 더 크고 실해. 속이 차야 맛있지. 한 번 해두면 온 가족이 일 년을 먹는데.”

김장철을 맞아 지난 7일 제주민속오일시장 채소 가게에 배추가 가득 쌓여있다. 문정임 기자

한 방문객이 제주민속오일시장에서 모자를 고르고 있다. 문정임 기자

토요일 오일장에 좌판 반 사람 반이다. 김녕 양파, 구좌 당근, 선흘 도라지. 제주도 곳곳에서 재배한 각종 농산물이 마트보다 조금 더 저렴한 가격에 손님을 기다린다. 올해산 돼지감자도 이번 장에 처음 나왔다. 꽈배기·호떡·어묵을 파는 분식 가게에는 어른 아이할 것 없이 줄이 길게 섰다.

이 장엔 농수축산물은 물론 신발·그릇·커텐·철물·갈옷·곤충까지 안 파는 것이 없다. 1998년 지금 자리로 이전할 당시엔 점포 수가 1300개나 됐다. 지금은 950개로 줄었지만, 여전히 전국에서 가장 큰 축에 든다. 2일과 7일에 장이 서는데, 이날처럼 주말에 장이 들면 주변에 차 세울 곳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방문객이 몰린다.

제주민속오일시장에서 붕어빵을 팔고 있다. 호호 불어 먹는 붕어빵은 겨울에 잘 어울리는 간식이다. 문정임 기자

제주민속오일시장의 한 상인이 신식 기기로 넓적한 뻥튀기를 뽑아내고 있다. 문정임 기자

118년된 오일시장
제주민속오일시장이 개장한 건 1906년, 제주시 관덕정 광장이었다. 이후 건입동, 서사라, 용담1동, 오라동, 연동으로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겼다. 제주 사람들은 바다에서, 밭에서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구하는 자급 자족적인 생활을 지속해왔다. 옛날 장터에선 서로가 생산자이고 소비자였다.

오일장에선 싸전 상인들이 터줏대감이다. 시장 입구 맨 첫 자리에 좌판을 편 강여생 어르신(86)은 서사라 시절부터 장사를 했다. 제주민속오일시장이 지금의 농협 제주지역본부 맞은 편에 자리를 편 게 1969년이니, 족히 50년은 됐다.

강여생 어르신이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문정임 기자

그녀의 고향은 한림이다. 애월 납읍리로 시집가 딸 다섯과 아들 하나를 낳아 길렀다. 지금은 장터와 가까운 노형에 산다. 강 어르신은 오일장 근처에 육지 사람이 주인인 땅을 공짜로 빌어 꿩마농(달래)을 심었고, 그전엔 깨를 심어 수확했다고 말해주었다.

자녀들이 모두 성장해 용돈벌이만 하면 되시겠다고 하니 이젠 손주들이 더 많이 생겼다며 손사래를 친다. 기장을 빼고는 모두 제주산 아니면 국내산만 판다는 강여생상회다.

겨울을 나는 일

이날 제주의 아침 기온은 6도였다. 평년보다 높지만, 한동안 봄인가 싶을 정도로 온화했던 날씨가 갑작스레 추워지며 깊은 한기를 뿜었다.

겨울은 입동(11월 8일)에서 이듬해 입춘(2월 4일)까지다. 제주의 겨울철 평균 기온은 5도를 상회해 따뜻한 편에 속한다. 하지만 해발 200m 이상 중산간과 산지에는 눈이 많고, 바람이 세 추위에 대비해야 했다. 그것은 가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성산일출봉은 우도와 함께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제주의 대표적인 관광지다.

정상부에 오르면 탐방 계단 옆으로 오목하게 파인 분화구를 볼 수 있다. 직경 600m, 둘레 1.2㎞, 넓이는 13만㎡에 이른다.

성산일출봉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 이 하산길이 옛날 성산 마을 소가 월동을 위해 분화구를 오가던 통로였다. 탐방로 뒤로 분화구가 보인다. 문정임 기자

성산일출봉 자락에는 성산마을이 있다. 성산일출봉 분화구는 성산마을 사람들 공동 소유의 ‘새’(茅) 밭이었다. ‘새’는 볏과의 여러해살이풀인 ‘띠’를 말한다. 초가 지붕을 잇는 재료다.

생활사 연구가 고광민씨 조사에 따르면, 1970년 전후까지 이 마을에 50마리의 농우가 있었다.

이 마을의 소들은 4~11월까지 마을 주변의 들판에서 풀을 뜯으며 자랐다. 그리고 소설(11월 22일)부터 이듬해 청명(4월 4일)까지 성산일출봉 분화구에 올라가 겨울을 넘겼다.

성산 사람들은 소설 무렵에 ‘새’(띠)와 잡초를 수확한 뒤 소를 분화구로 올려보냈다. 그러면 소들은 분화구에서 남은 새와 잡초, 그루터기에 남은 마른풀 등을 먹으며 분지에서 비교적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었다.

덕분에 성산 사람들은 소에게 별도의 월동 사료인 ‘촐’(목초)을 먹이지 않아도 되었다. 대신 소들이 마실 물은 소의 주인이 5일에 한 번 물이 담긴 ‘허벅’을 등에 지고 실어 날랐다.

일출봉 정상까지 오르는 길은 매우 가파르다. 사람이 오르는 길과 소가 오르내리던 길이 달랐다. 2013년 만들어진 지금의 탐방로 ‘하산길’이 당시 소들이 석벽을 타고 오르던 통로다. 가파른 석벽을 덩치 큰 소 수십 마리가 줄지어 올랐다니, 지금으로선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성산읍의 겨울 풍경이다.

한림공원에 재현된 제주 초가. 문정임 기자

새로운 해의 준비

가을이 잡곡 농사를 마무리하고, 일가친척들이 모둠벌초에 나서는 공동체 결집의 시기라면, 겨울은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시기다.

제주 사람들은 동지(12월 21일)가 되면 ‘아세’ 또는 ‘작은 설’이라고 해서 팥죽을 먹으며 액운이 없는 새해가 오기를 기원했다. 또 이 무렵 이듬해 먹을 장과 엿을 만들기 시작했다.

상품으로 출시된 꿩엿. 제주도 제공

그중 꿩엿은 제주에서만 볼 수 있다. 제주 사람들은 개인 또는 집단으로 월동기에 장끼를 사냥했다. 잡은 꿩을 찹쌀, 엿기름과 같이 넣고 고아 단지에 보관했다가 몸이 아프면 한 숟가락씩 떠먹었다. 먹을 게 없던 중산간 주민들에게는 겨울을 나는데 중요한 보양식이 되었다. 이름은 엿이지만 조청처럼 살짝 묽은 질감이다.

한 해 동안 비바람을 견뎌온 지붕을 새로운 재료로 교체하는 일도 겨울에 이루어졌다.

초가 지붕의 재료는 새(띠)다. 들녘의 흔한 풀 같지만, 제주에선 없어선 안 될 귀중한 자원이었다. 아무나 벨 수 없었고, 대대로 물려받는 귀한 유산이었다.

보통 초가는 2년에 한 번 교체했는데, 교체 시기에 든 가정은 무척 바빠졌다. 집 한 채를 띠로 이으려면 상당한 양이 필요했다.

지난 1월 제주소방안전본부가 신구간 가스 안전사고 주의보를 발령했다.

제주만의 이사철

제주의 겨울철 문화 중 신구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전통이다.

제주에서는 대한(1월 20일) 후 5일째부터 이듬해 입춘(2월 4일)이 되기 3일 전까지 1주일을 지상에 사는 신들이 하늘로 올라가 비는 기간이라고 생각했다.

제주 사람들은 이때는 생활에 관한 어떤 일을 해도 ‘동티가 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주로 건축, 수리, 이사 등을 했다. 육지의 ‘손없는 날’ 풍속이 제주에선 1년 중 이 무렵에 집중돼 있다고 보면 된다.

예전보다는 줄었지만 지금도 제주에선 신구간이 주요 이사철로 여겨진다.

신구간이 되면 지자체는 대형 폐기물 수거반을 확대하고, 제주소방안전본부는 가스 안전사고 주의보를 발령한다. 이사 비용도 이 무렵엔 더 비싸진다.

서귀포시는 매년 중문색달해수욕장에서 펭귄수영대회를 열고 있다. 사람들은 새해 첫날 밝은 기운을 얻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기 위해 찬 바다에 몸을 담근다. 제주관광공사 제공

제주의 겨울은 꽤나 낭만적이다. 한라산에서 해안변까지 낮게 퍼지는 중산간 들녘을 따라 하얗게 눈이 쌓인 모습은 평화롭고 때로 따뜻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옛날 제주 사람들이 정성껏 음식을 준비해 무사와 풍요를 기원했던 경외의 바다는 이제 레저객들이 새해 첫날 인간 펭귄을 자처하며 수영을 겨루는 흥겨운 장이 됐다.

내년 1월 1일에도 중문색달해수욕장에선 ‘서귀포겨울바다 국제펭귄수영대회’가 열린다. 올해로 스물여섯 해째다. 추운 바다에 어찌 몸을 담그려는지 사전신청분 대부분이 벌써 마감됐다.

2025년은 을사년, 푸른 뱀의 해다. ‘을(乙)’은 목(木)의 기운을 지닌 천간으로 성장과 생명력을, ‘사(巳)’는 신중하고 부드럽게 변화를 모색하는 해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이런 깊고 심오한 뜻이 아니라도, 시작이 주는 의미 하나로 충분하다. 우리에게. 새해는.

※이 기사는 제주특별자치도와 공동으로 기획했습니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