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3일 11시경, 한창 야근하던 중이었다. 일을 거의 끝내고 수정하고 있었다. 그 순간, 틀어둔 TV에서 두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이다. 국회 통고도 없이 이루어진 초법적 조치였다.
창밖을 내다보자 이미 국회 출입문이 굳게 닫히며 경찰 버스들이 주변을 봉쇄하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들려오는 헬리콥터 소리와 함께 들이닥친 계엄군은 국회 점거를 시도했다. 동시에 국회의원들과 보좌진들의 출입을 막았으며, 그중 일부는 담장을 넘어 본회의장으로 들어가야 했다. 동료 보좌직원들도 첩보 영화 찍듯이 몰래 숨어들어왔다.
이 비현실적인 현실 속에서 문득 ‘게임 속 계엄령(혹은 이에 준하는) 상황’을 소개하고 이번 사태와 비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시사점이 많으리라 생각했다.
소개할 게임들 대부분은 극단적 위기나 재난 상황을 겪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This War of Mine’은 전쟁으로 도시가 초토화되고 식량과 의약품이 바닥난 상황이다. ‘Tom Clancy's The Division’도 치명적 바이러스로 뉴욕이 봉쇄되는 극한 상황에서 계엄령을 다룬다.(Directive 51 조치는 사실상 계엄령이다.) 두 게임 모두 군부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시민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12.3 비상계엄조치도 이러한 점에서는 게임 속 그것과 닮아 있다. 그러나 12.3 사태는 게임 속에서 묘사된 극단적 위기 상황도 없이, 단지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포되었다는 점에서 큰 차이점이 있다.
‘Papers, Please’는 독재국가의 입국심사관이 되어 시민들의 서류를 검열하는 게임이다. 계엄과 같은 통제체제가 시민의 일상을 어떻게 옥죄는지 보여준다. 게이머는 생계를 위해 비인간적인 검열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의 계엄군은 게임 속보다 더 과격했다. 중앙선관위를 3시간 20분간 점거했고, 국회의사당 유리창을 깨고 진입을 시도했다.
‘Frostpunk’의 게이머는 영하 150도의 혹한 속에서 인류 최후의 도시를 이끄는 지도자가 되어 게임을 플레이한다. 계엄령은 아니지만, 시민의 생존을 위해 계엄령 수준의 강압적 통치를 할 수 있는 게임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극한의 추위라는 명분이 있었다. ‘시민의 생존’이라는 대의를 위해 ‘시민의 자유’를 희생할 수 있느냐는 묵직한 질문도 던진다. 반면, 12월 3일 우리가 겪은 계엄령은 그런 명분조차 찾기 어려웠다.
‘Tropico’ 시리즈도 유명하다. 독재자가 되어 국가를 경영하는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이 게임에서 계엄령은 최후의 수단이거나, 독재 정권의 폭압성을 상징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더불어 이 게임의 계엄령은 최소한의, 적법한 절차를 거쳐 선포하게 된다. 12.3 계엄령은 달랐다. 우리는 그런 절차도 없이 선포된 계엄을 목격했다. 국회의 동의는커녕 통고조차 없었고, 계엄군은 법적 근거 없이 국회 활동을 제한하려 했다.
이 게임은 다른 교훈도 준다. 무턱대고 계엄령을 발령하면 관광객이 급감하며, 경제가 붕괴하는 등 심각한 부작용이 따르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게이머들은 계엄령이 얼마나 위험한 통치수단인지를 학습하게 된다. 바꿔 말하면, 이제 이 같은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실제로 이미 여러 지표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종합해보자면, 현실의 12.3 계엄령은 게임 속 계엄령보다 더 허구적이라는 결과에 이른다. 참 씁쓸한 대목이다. 심지어 계엄군 투입과정에서 일부 병력은 헬기 탑승 직전에야 목적지를 알았고 어떤 이들은 내리는 순간까지도 어디인지 몰랐으며 아무런 브리핑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무질서한 계엄령 집행은 게임 속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장면이다.
계엄군의 무력 사용과 헌법기관 침탈 시도는 국회의 발 빠른 계엄해제 결의로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한지, 그리고 우리가 게임 속 디스토피아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게임에서는 세이브 포인트로 돌아가 다시 플레이하는 것이 가능하기라도 하지, 현실에서는 그럴 수도 없다. 불과 6시간 동안의 계엄령이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생긴 상처와 불신은 오랜 시간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음 스테이지를 준비해야 한다. 이번 일을 교훈 삼아 민주주의를 더욱 견고히 하고,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책을 마련해야 한다. 게임 오버는 없다. 우리 모두가 플레이어이자 개발자인 이 현실에서, 더 나은 엔딩을 만들어가야 할 때다.
국회 이도경 보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