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수가 말하는 젠지의 2024시즌

입력 2024-12-09 22:12 수정 2024-12-15 17:21
젠지 김정수 감독이 9일 서울 강남구 젠지 사옥에서 국민일보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최현규 기자

젠지 김정수 감독이 올해의 경험을 밑거름 삼아 내년에는 더 많은 우승컵을 들어 올리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올해 젠지와 김 감독은 2번의 우승과 1번의 준우승을 경험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e스포츠의 꽃인 리그 오브 레전드(LoL) 월드 챔피언십에서 4강 탈락했다. 결과적으론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9일 서울 강남구 젠지 사옥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한 그는 “최선을 다했는데 원했던 결과를 얻지 못해 아쉬웠다”면서 “내년에는 성적으로 보여드릴 것”이라고 말했다.

-2024년 한 해 동안 젠지의 사령탑을 맡았다. 지난 1년을 되돌아본다면.
“아쉬움과 보람이 공존한 한 해였다. 올해 팀에서 내게 요구한 건 베테랑 선수들을 하나로 융화시키는 일이었다. 올해 젠지 선수단은 ‘페이즈’ 김수환을 제외하고 전부 베테랑이었다. 각자 오랫동안 프로 생활을 해오며 만들어온 자신만의 루틴, 챔프 상성과 이해도, 운영 방법이 있었다. 그들이 가진 엄청난 능력들이 시너지 효과를 내게끔 토론하고 회의하고 노력했다. 더불어 내년에는 선수들이 더 다양한 챔피언을 고를 수 있도록 돕는 게 코치진의 목표다.”

-LCK 스프링 시즌을 우승하며 기세 좋게 출발했다. 시즌 시작 전부터 우승을 예상했는지.
“우승을 목표로 했지만 확신하진 못했다. 여론은 젠지를 T1, 한화생명e스포츠와 함께 ‘톱3’로 뒀고 내부적으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스프링 시즌 우승 비결은 다른 팀들보다 앞섰던 운영 능력이다. 불리한 게임도 중후반에 역전하는 저력이 있었다. 반면 승기를 잡은 게임에선 역전을 허용하지 않았다. 어디서 뭉쳐야 할지, 어디에서 싸워야 할지, 언제 턴을 이용해야 할지를 다른 팀, 다른 선수들보다 잘 알았다.
운영은 김기인과 정지훈이 주도했다. 라인을 어디까지 밀어야 할지, 챔피언의 특성에 맞춰 라인을 미는 대신 한타를 억지로라도 열지, 이번 게임에선 한 명에게 CS를 몰아줄지, 상대방에게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때는 어떻게 움직일지 등을 두 사람이 빠르게 판단하고 얘기했다. 두 사람의 판단력과 콜을 스프링 시즌 당시에는 다른 팀들이 따라오지 못했다.”
라이엇 게임즈 제공

-가장 기억에 남는 스프링 시즌 경기가 있다면.
“KT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세나·노틸러스를 풀어줬다가 졌다. 이제야 얘기하는 거지만 우리도 연습에서 세나·노틸을 정말 많이 해봤다. 아마 20판 넘게 했을 거다. KT전에서는 ‘세나·노틸은 초반에 약하니까 우리가 초반에 충분히 스노우볼을 굴릴 수 있다’고 판단해서 상대에게 풀어줬다. 그랬다가 첫 세트를 졌는데 경기장에 있던 8명 중 단 한 명도 세나·노틸을 패인으로 여기지 않았다. 2세트까지 세나·노틸에 지고 나서야 ‘이거 세나·노틸 때문에 졌다’고 오는 길에 결론을 냈다. 티어 정리를 다시 하고 인 게임 전략도 새롭게 수립했던 게 기억 난다.”

-플레이오프를 준비하고 치르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디플러스 기아 상대로 풀 세트 접전을 벌였던 게 기억에 남는다. 이상하게 스크림에서도 대회에서도 디플러스 기아가 까다로웠다. ‘루시드’ 최용혁이 리 신, 바이, 세주아니처럼 이니시에이팅 능력이 좋은 챔피언을 잘했다. ‘쇼메이커’ 허수의 챔피언 폭을 밴픽으로 막을 수가 없었다. 이것저것 다 밴하면 르블랑, 트위스티드 페이트를 하니까. 허수가 익숙하지 않은 챔피언을 고르고 ‘에이밍’ 김하람까지 잘하니까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승에서 T1과 만나 풀 세트 혈투를 벌였다.
“힘든 게임이었다. 역시 T1은 T1인가 싶더라. 그때 T1이 신 짜오를 연속으로 사용했다. 나는 4세트에서 신 짜오를 밴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캐니언’ 김건부가 ‘도대체 왜 신 짜오를 밴해야 하냐’고 하더라. 사실 신 짜오가 OP 챔피언이었다면 무조건 밴을 했겠지만 ‘오너’ 문현준이 잘 쓴 것이지 챔피언 성능만 놓고 보면 그 정도가 아니었다. 건부가 ‘신 짜오를 내주고 잭스나 카직스로 집어삼키겠다’고 하더라. 건부는 신인도 아니고 베테랑에 월즈 우승자 출신이다. 그런 선수가 그 정도로 강하게 얘기하면 믿고 가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5세트 때는 정지훈이 코르키로 ‘페이커’ 이상혁의 오리아나를 상대했다. 정지훈이 ‘그렇게 하는 대신 바텀이 편해진다면 오리아나 밴을 풀자. 내가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하더라. 바텀의 캐리력을 서로 낮추고 상체 싸움으로 가기 위한 밴픽이었다. 선수들한테 ‘지면 내가 잘못한 거니까 지고 시원하게 욕먹겠다. 일주일 동안만 인터넷 하지 말자’고 얘기했던 게 기억난다. 하하.”
라이엇 게임즈 제공

-5월 중국 청두에서 열린 MSI에 참가해 우승 행진을 이어나갔다.
“MSI 기간에는 팀의 기세가 좋았기에 우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지난 1년 내내 선수들이 치열하게 피드백했는데 MSI 기간의 팀 분위기가 가장 원만했던 것 같다. ‘리헨즈’ 손시우가 많이 아파서 5~6일 정도 연습에 참여하지 못했다. 경기날이면 경기만 소화하고 다시 다음 경기 전까지 휴식만 취했다. 조세형 코치가 스크림을 대신 참여하기도 했다. 시우가 콜록콜록거리면서도 막상 경기에선 최선을 다해줬다.”

-결승전에서 중국 BLG를 상대로 3대 1로 이겼다.
“앞서 밝혔던 대로 샤코처럼 별의별 챔피언을 다 연습했다. 메타 챔피언 말고 다른 챔피언을 연습하는 데 이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해도 될지 불안할 정도로. 하지만 당시에 선수들이 ’메타 챔피언은 경기장에서 바로 꺼낼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숙련도에 자신 있는 상태였다. 경기 전날 밴픽 회의만 2시간 넘게 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결승전 1세트 때 크산테, 세나, 탐 켄치를 가져갔다. 상대는 루시안·나미를 골랐다. 기인이가 크산테를 누구보다도 많이 한 선수다. ‘루나미는 한타에서 잘 큰 크산테를 못 잡는다’고 하더라. 바텀도 세나·켄치가 루나미 상대로 버티면 이긴다고 하고. 그러면 라인전을 지고 게임을 이기자고 했다. 기인이가 ‘라인전 다 진다고 XX 밴픽이라고 또 욕 먹겠다’고 하더라.(웃음)
결승전에서 기인이에게 미안했던 건 있다. 기인이에게 ‘1페이즈에서 어떤 게 나와도 우린 탑 챔피언을 아래서 뽑겠다. 밴 카드도 너에게 투자해줄 수 없다. 상대 탑라이너가 잘하는 선수인 건 알지만 네가 조금만 버텨주면 다른 라인에서 밴픽 이점이 생긴다’고 했다. 기인이가 침착하게 ‘괜찮다.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고 하더라. MSI는 탑 덕분에 다른 라인이 주도권을 가져갈 수 있었던 대회다.”

-‘더샤이’ 강승록, ‘너구리’ 장하권 등을 지도해봤다. 그들과 비견될 만한 김기인만의 장점이 있던가.
“기인이는 침착하다. 대체로 탑라이너들은 상대 정글러의 위치가 안 보여도 일단 딜 교환을 해본다. 라인전에서 지는 걸 힘들어한다. 정글러를 불러서 턴을 쓰게 한다. 기인이는 완전 반대다. 정글러를 부를 땐 부르는데 건부에게 정보를 주고 판단을 맡긴다. ‘지금 탑은 이러이러한 상황이고 오면 킬을 딸 수 있다. 아니다 싶으면 네가 알아서 해’라고 한다. 밴픽에서도 양보를 많이 해줬다. 큰 경기에 나서면 어떤 선수든 흥분하고 목소리를 내기 마련이다. 기인이는 혼자 침착하게 몬스터 한 캔 먹고 있다. 기인이의 대담함과 침착함이 인상 깊었다.”

-라인전을 지고 게임을 이긴다, 소위 ‘밸류 픽’은 올해 젠지의 밴픽 기조를 상징하는 표현이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선수단의 라인전 체급이 정말 좋았다. 라인전에서 밀리는 챔피언을 해도 버틸 수 있고, 후반 운영을 잘하니까 초반 단계만 잘 넘기면 안 진다고 판단했다. 선수들이 초반에 찍어 누르는 픽을 못하는 건 아니어도 성향상 선호하지 않았다. 어떤 챔피언이 블루 1픽 감인지는 젠지 코치진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정해진 밴픽 양상을 깬 적이 많았다. 그걸 내주고 상대하는 게 더 이길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일각에서는 그걸 두고 오만 밴픽이라고 했지만 우리로서는 자는 시간 제외 전부 연습에만 투자하고 최선을 다해서 결론을 낸 밴픽이었다.”
젠지 김정수 감독이 9일 서울 강남구 젠지 사옥에서 국민일보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최현규 기자

-곧바로 LCK 서머 시즌에 돌입했다. 선수들에게 무엇을 주문했나.
“서머 시즌엔 선수들에게 특별한 것을 주문하지 않았다. 그동안 선수들이 잘해오기도 했고. 무엇보다 선수들이 지쳐 있었다. MSI를 다녀오자마자 베트남과 사우디아라비아를 오가며 스케줄을 소화했으니까. 우리는 올해 스크림을 가장 많이 한 팀 중 하나였다. 선수들에게 최대한 많은 휴가를 보장해줬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기에 체력 안배에 중점을 뒀다. e스포츠는 격한 신체적 활동이 없다 보니 선수들이 체력적으로 어려움을 겪진 않는다. 대신 정신이 쉽게 지친다.”

-피로에 대한 염려와는 별개로 정규 리그를 17승1패로 마무리했다.
“계속 이기기만 해도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영양가 있는 피드백을 하기가 어렵다. 패배에서만 배우고 깨달을 수 있는 것들도 있기 마련이다. 정규 리그에서 독주하는 것보단 몇 차례 지면서 배울 건 배우는 게 이상적이라고 본다. 그래도 결과적으론 선수들 덕에 정규 리그를 잘 소화해냈다.”

-서머 시즌은 쌍포 메타의 전성기였다. 젠지가 이 메타를 가장 잘 소화했다.
“비결은 챔피언 폭이다. 특히 지훈이가 못하는 미드 챔피언이 없었다. 이제야 얘기하자면 미드 자야도 연습했고 승률도 잘 나왔다. 드레이븐, 자야. 루시안…저격밴 5개를 당해도 문제 없을 정도로 정지훈의 챔피언 폭이 넓어서 다 이길 수 있었다. 여기에 수환이까지 잘해주니까. 아울러 탑이 럼블을 하는 경우가 아니면 정글에서 AP 챔피언을 뽑아야 했다. 다른 팀들은 미드가 AD를 뽑으면 정글에서 AP 탱커를 뽑았다. 건부가 니달리를 선호하고 잘해서 우리는 니달리+AD도 쓸 수 있었다. 개인 기량이 뛰어나서 챔피언 간 시너지 없이도 각자 스노우볼을 굴릴 수 있었다.”

-스프링에 이어 서머 시즌에도 KT에 한 차례 일격을 맞았다.
“스프링 시즌의 세나·노틸과 비슷하다. KT전 후 스몰더 때문에 진 건지를 두고 토론했다. 우리는 스몰더를 좀 늦게 쓴 편이다. 처음에는 초반을 못 버티는 챔피언이라고 생각했다. 스크림을 통해 데이터를 쌓은 뒤 결승전에서야 꺼냈다. 결승전 1세트에서 스몰더를 썼다가 졌다. 스몰더 때문에 진 건 아니었는데 1세트 패배 후 ‘일단 스몰더를 닫자’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판단을 잘못했던 것 같다.”
라이엇 게임즈 제공

-월즈에서도 우승컵을 놓쳤다. 우승 후보로 평가받았는데 4강에서 T1을 만나 탈락했다.
“최선을 다했는데, 열심히 준비했는데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아쉬웠다. 대회 초반에는 분위기가 좋았다. 연습에서도 많이 이겼다. 그런데 8강 플라이퀘스트전부터 힘들더라. 8강, 4강에서는 명백하게 (플레이가) 안 됐다. 4강에서 떨어졌으면 누구 하나가 못해서 진 게 아니지 않나. 팀이 못해서 진 것이지. 최근에 권영재 코치와 ‘내년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고 얘기를 나눴다. 밴픽도 선수의 의견을 들어준 부분이 있지만 어쨌거나 최종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다. 선수 설득도 감독의 능력이니 내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차기 시즌엔 다를까. 최근 ‘룰러’ 박재혁, ‘듀로’ 주민규가 새로운 바텀 듀오로 합류했다.
“박재혁과 2016년 함께 한 적이 있다. 그땐 나도 신인 코치였고 박재혁도 신인 선수였다. 둘 다 어렸고 경험도 적었다. 약 10년이 지나서 베테랑 감독과 선수로 만나게 됐다. 그때 저질렀던 실수들을 반복하지 않고 이번엔 더 노련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재회한 지 얼마 안 돼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진 않았다. 박재혁이 워낙 베테랑이니까 팀을 잘 이끌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주민규에게는 부담감을 갖지 말라고 당부했다. 내년에 주민규는 아마 그동안 받아온 것보다 몇 배는 더 큰 관심과 기대를 받게 될 것이다. 조바심이 나서 뭘 하려고 애쓰기 보다는 경험 많은 형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형들의 장점만 습득해나갔으면 한다. 신인답게 실수를 해도 된다고 말했다.”

-올해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년에 꼭 개선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밴픽이다. 베테랑이 많은 팀이라고 해서 밴픽이 쉬운 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주관이 강해서 각자가 원하는 플레이와 픽과 순서가 뚜렷하다. 5명의 생각을 최대한 통일시키고, 다섯이 하나로 융화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겠다. 올해 큰 경기에서 드러난 단점과 아쉬운 점을 보완해서 내년엔 반드시 월즈에서 웃도록 하겠다. 2025시즌 젠지는 많은 기대를 받는 팀이다. 지금 여기서 거창한 각오를 말씀드리기보다는 내년에 우승과 성적으로 보여드리겠다.”

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