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모임 한울회 40년 멍에에도 희망 잃지 않는 법…“믿음과 바른정신”

입력 2024-12-09 14:40 수정 2024-12-10 08:20
한울회 구성원들이 발생하기 전 예배 후 사진관에서 함께 찍은 기념 사진. 앞줄 왼쪽부터 세 번째 이충근 교사, 네 번째 홍응표 목사, 일곱 번째 박재순 목사.맨 윗 줄 첫 번째 김종생 총무. 국민일보DB

초대교회처럼 따뜻한 사랑을 나누던 곳, 교사, 대학·청년부터 중·고등학생까지 한자리에 모여 성경공부를 하고 인문학 지식을 쌓았던 곳.

이는 전두환 정권 시절 반국가적집단으로 지목돼 국가보안법과 계엄법 위반 혐의로 실형을 받은 기독교 모임 ‘한울회’를 기억하는 이들의 표현이다. 당시 한울회 공안 조작 판결로 4년 실형을 선고받았던 박재순(74) 목사는 9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성경공부가 주를 이뤘지만 고전문학 등 인문학 자료를 읽고 함께 공부하며 대화와 토론을 진행한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사건 발생 40년이 흐른 지난해 12월 12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한울회 사건에 대해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다. 오는 12일이 진실 규명 결정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한울회 사건은 대전 지역 기독교인 모임 한울회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공산주의를 찬양했다는 이유로 공안 당국이 1981년 3월 강제 수사에 착수하며 시작된 사건이다. 비슷한 시기 대전지역에는 아람회 청람회 등 반국가단체 공안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기소된 6인은 박 목사를 비롯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 김종생 목사, 이규호(1958~2021)씨, 이건종(68)목사, 홍성환(73)씨, 이충근(68)씨다. 이들은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는 동안 수사관들로부터 폭행과 고문 등 가혹 행위를 당했고 진술을 강요하는 등의 조작 정황도 있었다.

당시 서울대 졸업 이후 한신대 신학대학원에 다니고 있던 박 목사는 12·12 광주 사태가 터졌을 때 학생들에게 기독교적 해석을 가르쳤다고 말했다. 박 목사는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인들이 민간인을 학살하고 폭행하는 상황에 대해 용납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며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민이 시민을 살상한 상황에 대해 마가복음 5장의 귀신 들린 군대 이야기를 나눴다”고 전했다.

박 목사가 한울회에서 나눈 기독교적 사랑과 학술적 대화는 반국가행위로 규정돼 반란죄 판결을 받았다. 1982년 대법원이 “한울회를 반국가단체로 볼 증거가 없다”며 파기환송 처리했지만 서울고등법원에서 대법원판결을 뒤집는 결정을 내리며 이들은 반국가단체 누명을 벗지 못했다. 올해 2월 서울고등법원에 재심을 신청했지만 법원은 개시 여부를 밝히지 않고 있다.

NCCK 총무인 김 목사도 한울회 사건으로 2년 6개월을 복역했다. 김 목사는 “40년 전 우리가 겪은 정치 역사적 트라우마가 현재까지 반복되고 있다”며 “국가폭력이 개인의 삶을 얼마나 혼란스럽게 하고 흩트려놓는지를 경험했기 때문에 지난 3일 벌어진 사태에 대해 그 공포감이 더했다”고 전했다. 그는 자신이 겪은 아픈 역사가 반복되는 현실에 더욱 적극적으로 기독교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김 목사는 “옥중에서 내가 마주한 현실과 상황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며 치열하게 기도했다”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앓는 소리를 안타깝게 여기신 하나님이 그의 일을 하라는 사명을 주신 것 같다. 억울하고 속상한 이들의 곁에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이러한 아픔 속에서도 한울회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박 목사는 “공안 사범으로 낙인찍혀 진로를 틀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믿음과 바른 정신을 붙잡았다”며 “아픔이 내 믿음과 민주주의 중요성이라는 철학을 굳건하게 한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김 목사는 “감옥에 갇혔을 때, 나를 둘러싼 환경이 어둡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하늘을 보고 의지했다”며 “특히 청년세대가 절망하지 말고 주님께서 길이 되신다는 사실을 믿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와 행동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권했다.

박윤서 기자 pyun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