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수건 같은 바이올리니스트가 꿈”···비오티 콩쿠르 韓 최초 입상 김현서

입력 2024-12-03 15:46
제74회 비오티 국제 음악 콩쿠르 최연소 2위와 청중상을 수상한 바이올리니스트 김현서가 최근 서울 광진구의 한 카페에서 자신의 바이올린을 품에 안은 채 미소짓고 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1985년 성악가 조수미, 2002년 피아니스트 손열음.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조반니 바티스타 비오티(Giovanni Battista Viotti)의 이름을 따 1950년부터 개최해 온 ‘비오티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은 대표적인 대한민국 음악가들이다. 지난 10월 이탈리아에서 열린 74회째 콩쿠르에서는 ‘최연소’ ‘최초’라는 수식어를 단 음악가의 이름이 시상대에 울려 퍼졌다. 바이올리니스트 김현서(14).

비오티 콩쿠르 최연소 2위 수상, 한국인 최초의 바이올린 부문 수상자로 기록된 김현서를 최근 서울 광진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가녀린 손목, 앳된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네던 열네 살 소녀에게선 대화를 나눌수록 성인 못지않은 담대함과 성숙함이 엿보였다.

“결선에 오른 3명의 바이올리니스트와 함께 무대 위에서 발표를 기다리는데 떨림이 멈추지 않았어요. 그런 순간마다 저만의 루틴이 있어요. 마음속으로 조용히 되뇌는 거예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 1:9).”
바이올리니스트 김현서가 지난 10월 열린 '제74회 비오티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2위상을 수상한 뒤 박수를 받고 있다. 비오티 국제 음악 콩쿠르 제공

결선에서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연주해 2관왕을 차지한 그가 최연소 2위 수상이란 기록보다 더 감격을 느낀 순간이 있다. 바로 청중상 수상자로 발표됐을 때다. 김현서는 “객석에 있는 300여 청중들의 투표로 선정되는 상이라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연주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와 감정이 공감을 받았다는 생각에 울컥했다”고 회상했다.

네 살 되던 해 어머니가 쥐어준 장난감 바이올린으로 처음 활을 잡은 김현서는 유독 어린이 찬양을 듣고 따라 연주하길 좋아했다. 이후 한국예술영재교육원에서 고(故) 김남윤(1949~2023) 교수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꿈을 꾸게 됐다.

그는 “김 선생님은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모범이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주셨던 분”이라며 “연습실 벽에 ‘하루 연습을 거르면 본인이 알고, 이틀 거르면 비평가가 알고, 사흘 거르면 청중이 안다’는 말씀을 붙여두고 늘 성실함을 강조하셨다”고 설명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현서가 지난 10월 열린 '제74회 비오티 국제 음악 콩쿠르' 파이널 무대에서 연주하는 모습. 비오티 국제 음악 콩쿠르 제공.

인생의 8할을 바이올리니스트로 살아온 김현서의 손가락엔 바이올린 현을 수없이 오가며 쓸린 상처가 성실함의 훈장처럼 굳은살로 박여 있었다. 매일 아침을 성경 묵상과 필사로 시작하고 성경 한 구절을 암송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만큼 신앙에 있어서도 성실함이 배어있는 그에게도 위기는 일상처럼 찾아온다.

그는 “연습하는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답답함이 차오르고 이따금씩 슬럼프가 찾아올 것 같은 무기력함이 느껴질 때도 있지만 잠시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성경을 읽거나 좋아하는 역사책을 보다보면 다시 활을 들 에너지가 생긴다”며 웃었다.
바이올리니트스 김현서가 지난 2021년 5월 교회 주일예배에서 특송 연주를 하는 모습. 유튜브 캡처

일상 속 조금 특별한 무대는 김현서의 활력소가 돼주기도 한다. 바로 교회에서 특송 연주를 하는 순간이다.

“무대에서는 제가 해석한 곡의 개성을 표현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관객들과 교감하는 것에 집중한다면 특송 연주는 완전히 달라요. 제가 하나님께 직접 올려드리는 기도라는 생각으로 바이올린을 들죠. 클래식 연주는 제가 곡을 이끌어 가지만 찬양 연주는 겸손한 마음으로 곡을 따라갑니다. 그 모습이 성도님들에게 은혜가 된다고 하니 감사할 따름이에요.”

바이올리니스트로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에 대해 김현서는 “연주 후 사람들이 박수쳐주고 격려해주는 순간도 좋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활용해 관객들에게 위로와 행복을 주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라고 전했다. 세상에서 단 한 번만 연주를 할 수 있다면 그는 어떤 곡을 선보일까. 그는 주저함 없이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파르티타 제2번을 꼽았다.

“바흐의 음악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곡들이 많아요. 음악적으로 봤을 때도 화성이 심오한 듯하면서도 가장 깨끗하게 표현할 수 있죠. 특히 파르티타 2번 중에 샤콘느를 연주하다보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떠올라요. 15분여에 달하는 꽤 긴 악장에 기승전결이 있는데 그 안에 인간의 고뇌, 희열과 희망,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느껴집니다. 제 음악을 듣는 분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모두 담겨 있어요.”

김현서는 내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최연소 입학을 앞두고 있다. 그동안 영재교육원에서 또래 친구들과 연습하던 것과는 또 다른 환경이자 도전인 셈이다.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선생님, 선배들에게 많이 배우고, 찬양 속 가사처럼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정금같이 단련시키는 과정이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가장 소중한 친구인 바이올린을 가슴에 안은 채 취재진의 카메라 앞에 선 그는 ‘손수건 같은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다’며 웃어보였다.

“손수건을 항상 들고 다니는 편이에요. 긴장하면 땀이 많이 나고 손이 차가워지기도 하는데 땀을 닦으며 안정을 취하기도 하고 손을 감싸며 따뜻하게 체온을 높여주기도 하죠. 음악엔 살아 숨 쉬는 생명이 있어요. 나이 인종 문화적 배경이란 경계를 넘어 듣는 이에게 마음의 평안을 줄 수 있죠. 하나님께서 제게 그렇게 하셨듯이 영혼을 보듬어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어요.”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