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는 낭만이지만 결혼은 현실이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이질적 부분을 좁히며 함께 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통일과 북한 선교 역시 마찬가지다. 통일이든 선교든 상대방을 인정해야 가능하다. 흡수통일 정복주의 등을 배제하고 과정도 결과도 평화로운 통일을 생각하는 이들이 기독교 독립운동가 해석(海石) 손정도(1881~1931) 목사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기독교대한감리회 본부 선교국은 북한선교위원회 평화통일위원회 한민족통일신학연구소 북한회복감리교회연합과 함께 28일 서울 서대문구 감신대 웨슬리채플 열림홀에서 ‘화해의 역사를 이루는 통일선교학당 2024 하반기 공개강좌’를 열었다. 감신대 명예교수가 된 이덕주(사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이사장이 ‘북한선교 어떻게 할 것인가-손정도 목사의 자유와 평화의 꿈’을 주제로 강연했다.
이 교수는 손 목사의 삶을 이야기하기 전에 ‘기독교 사회주의’부터 말했다. 앞서 ‘기독교 사회주의 산책’(홍성사)을 펴낸 이 교수는 책에서 “자기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기독교, 개인의 자유보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독교, 모으는 것보다 나누는 것에 우선 가치를 두는 기독교, 복음에 철저했던 초대교회 신앙으로 돌아가는 기독교”를 일컬어 기독교 사회주의라고 칭했다.
친미 반공주의 기독교에 익숙한 이들에겐 사회주의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이 있으나, 이 교수는 강제적 평등이 아닌 자발적 나눔을 추구하고, 광야에서의 만나공동체를 지향하며, 사회적 소외계층과 경제적 빈곤층의 아픔과 고통을 해결하고, 시장주의 경쟁을 인정하지만 양극화 극복을 위해 사회적 견제가 필요한 제도의 틀을 갖추는 등의 요소를 기독교 사회주의로 꼽았다.
이 교수는 “기독교 사회주의를 몸소 실천한 이가 바로 손정도(사진) 목사”라고 강조했다. 기독교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와 마찬가지로 평안남도 강서군이 고향인 손 목사는 감리교 목회자로서 성령 체험을 바탕으로 웨슬리언의 사회구원이 바로 나라와 민족의 독립이라고 봤다. 동대문교회 정동제일교회에서 목회하며 수천명 성도들로 부흥시킨 부흥사였고, 고종과의 면담을 거쳐 1919년 3·1운동 직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훗날 임시의정원 의장을 역임했다. 감리교 중국 선교사를 역임했고 1920년대엔 지린에서 목회를 하며 ‘농민호조사’란 이상촌 운동을 했다. 농민호조사는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처럼 소유를 내놓아 공동 경작하며 기독교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공동체였다.
손 목사는 특히 평양 숭실중학 동문인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과 교분이 있었다. 부친상을 당한 김일성을 돌본 손 목사의 인연으로 북한 역시 ‘손정도 기념 사업회’를 구성해 비록 이데올로기는 다르지만, 나라와 민족을 위해 독립운동을 한 인물로 극찬하고 있다.
이 교수는 “통일 이후의 신학으로 기독교 사회주의가 배경이 될 수 있으며, 통일 이후 누가 북한 지역에 들어가 선교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 남과 북 체제를 모두 접한 탈북민을 떠올리게 된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내년 8월 편찬을 목표로 ‘북한기독교역사사전’ 발간을 준비 중이라고 전했다.
북한기독교역사사전은 개념 교회 인물 학교 병원 기관 사건 지역 노회 연회 등 1만1970여 항목을 담고 있으며 1945년 이전의 북한 교회를 총체적으로 복원하는 것이 목표다. 이 교수는 “탈북민 목회자와 신학생, 탈북민 교회와 가정, 북한선교기관 등에 사전을 보내는 권서(勸書) 운동을 진행 중”이라고 덧붙였다.
글·사진=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