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쓸모? “세상에 뿌려진 그리스도의 결실을 보고 판단하라”

입력 2024-11-28 15:30
GK 체스터턴은 평생 단편소설 200여편과 기고문 4000여편을 쓴 다작가다. 사진은 체스터턴이 작업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제공

“인간 본성에 관한 논의가 지금처럼 적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오늘날 자유란 누구도 종교를 논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제 온갖 신조에서 풀려나 완전한 자유를 누린다’고들 한다.”

국내외 지성·문화계의 최근 사조(思潮)를 논하는 얘기가 아니다. 20세기 초반 영국에서 소설가이자 평론가, 언론인으로 활동한 GK 체스터턴(1874~1936)이 119년 전 서구 사회 현실을 살피며 내놓은 진단이다. 추리소설 명작으로 손꼽히는 ‘브라운 신부’ 시리즈 작가인 체스터턴은 유물·진화론의 영향이 거셌던 당대 문예사조에 맞서 기독교를 적극 옹호한 변증가다.

GK 체스터턴(맨 오른쪽)이 1927년 생전 가까이 지내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맨 왼쪽)와 사상가 힐레어 벨록과 함께한 모습. 위키피디아 제공

상대의 논지를 유쾌하게 비틀어 주장의 모순을 드러내는 데 능해 ‘역설의 왕자’로 통한 그의 책 3권이 최근 동시 출간됐다. ‘G.K. 체스터턴 탄생 150주년 기념 대표작 세트’다. 체스터턴의 ‘변증서 3부작’인 세트는 국내에 처음 소개된 ‘이단’을 비롯해 ‘정통’ ‘영원한 인간’으로 구성됐다.


3부작 중 가장 먼저 출간된 책은 ‘이단’(1905)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와 공상과학 소설가 HG 웰스 등 당시 지성계를 대표한 이들의 주장을 논박한 글 20편을 모았다. 체스터턴에게 있어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중시하고 선과 철학은 사소한 것으로 치부한 이들은 ‘이단’적 존재다. “우리 시대에 철학이든 종교든 궁극적인 것에 관한 이론은 이들이 점했던 두 영역에서 거의 동시에 물러났다.… 만물을 다루는 일반론은 양쪽에서 추방당했다.”

체스터턴은 시대가 갈수록 사회가 발전한다는 ‘진보 사상’ 그 자체를 비판하진 않는다. 도덕과 교의(敎義)에 관한 신중한 고려 없이 무조건 ‘역사는 진보한다’는 구호를 외치는 행위를 경계할 뿐이다. 이는 그의 이름을 딴 ‘체스터턴의 울타리’를 떠올리게 한다. ‘무언가를 없애자고 주장할 땐 그 대상의 필요와 본질부터 따져야 한다’는 비유로 그가 논지를 펼칠 때 즐겨 사용했다.


정통’(1908)은 ‘이단’ 발매 후 ‘비판만 있고 대안은 없다’는 다수 독자의 지적에 답하기 위해 쓴 책이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교 신학이 ‘건전한 윤리의 가장 좋은 뿌리’”임을 세간에 알리는 데 주안점을 뒀다. 무신론과 불가지론, 범신론을 다룬 책을 섭렵하다 기독교로 회심한 체스터턴인 만큼 이들 주장의 핵심을 공정히 다루면서 논리의 불공정함을 날카롭게 논파한다. “그리스도교를 지지하는 내 증거들은 그리스도교에 반대하는 (이들이 말하는) 증거들과 똑같이 생생하고 다양하다. 반(反)그리스도교의 다양한 진리를 볼 때마다 나는 그 가운데 어느 것도 진리가 없음을 발견한다.”


영원한 인간’(1925)은 그가 전작 ‘이단’에서 비판했던 웰스의 ‘세계사 대계’에 대항해 집필했다. 지구 탄생에서 출발해 인류 역사 전반을 다루는 웰스의 저작에 상응하듯 체스터턴 역시 원시 시대 역사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원시 인류도 현대인처럼 신앙이 있다고 본 그는 “인간의 이야기에는 신성한 뿌리가 있기에 인류 공통의 종교 생활과 공정하게 비교하면 교회가 더욱 두드러진다”고 봤다. 서력기원(西曆紀元)에 따라 역사를 분류하며 예수의 출생이 인류사에 중차대한 사건임을 역설하는 체스터턴의 결론은 이것이다. “(인류사 속 그리스도교의) 열매를 보고 그리스도를 판단하라.” 세계 역사 속 기독교의 역할을 비하하는 이들에게 인류 역사상 기독교만큼 값진 진리와 결실을 준 종교가 있느냐고 되묻는 셈이다.


CS 루이스와 TS 엘리엇,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 세계 문학계에 한 획을 그은 이들이 입 모아 상찬한 체스터턴의 신앙관과 글맛을 동시에 접할 수 있는 책이다. 시대의 한계가 느껴지는 표현도 있지만 “사고(思考)와 영원한 열정의 날개가 달린 벼락처럼 여러 시대를 관통하는 교회는 경쟁 상대도 없이 오래된 만큼 새로울 것”임을 낙관하는 부분에선 예지적 통찰력도 엿보인다. 현대 사상의 흐름에서 기독교의 위상을 확인하고픈 이들이 특히 반길 만한 책이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