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서울돈화문국악당에서 열린 ‘홍성덕의 육자배기 사랑’은 한국국악협회와 전주대사습보존회 이사장을 역임한 원로 국악인 홍성덕(80) 명창이 육자배기 부활을 위해 마련한 공연이다. 육자배기는 6박 진양조장단에 맞춰 부르는 대표적 전라도 민요. 홍 명창의 어머니인 김옥진(1904~1972) 명창은 생전에 육자배기로 유명했다. 홍 명창은 2019년부터 육자배기의 보존과 전승을 위한 세미나, 공연, 출판, 경연대회 등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올해 공연은 홍 명창이 가족과 함께 육자배기를 부르고 싶다는 희망에서 기획됐다. 그도 그럴 것이 홍 명창의 딸은 국립창극단 창악부 악장인 김금미(60), 외손녀는 전주대사습놀이 학생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받은 박지현(22·서울대 국악과)이다. 모계 쪽으로 4대(代)가 소리꾼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김옥진 명창을 뺀 3대가 오는 12월 여성국극을 위해 다시 뭉친다. 국가유산진흥원이 12월 3일과 7일 서울 강남구 국가무형유산전수교육관 민속극장 풍류에서 여는 여성국극 특별공연 ‘한국 최초 여성 오페라, 전설(傳說)이 된 그녀들’에서다. 특별공연의 1부는 홍 명창 등 원로 여성국극 배우들의 토크 콘서트, 2부는 여성국극 ‘선화공주’ 공연으로 선보여진다. 홍 명창은 1993년 한국여성국극예술협회를 설립하고 지금까지 여성국극의 보존에 힘써왔다. 그리고 그가 직접 소리 지도를 한 이번 ‘선화공주’에는 딸과 외손녀가 출연한다. 공연을 앞둔 3대 소리꾼을 최근 국립극장에서 만났다.
김옥진 명창부터 시작된 모계 4대 소리꾼의 핏줄
“드라마 ‘정년이’ 덕분에 여성국극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들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동안 여성국극을 꾸준히 만들며 지켜왔기 때문에 ‘정년이’도 나왔다고 생각해요.”(홍)
홍 명창은 어머니 김옥진 명창과 명고수였던 아버지 홍두환 선일창극단 단장 슬하에서 자연스럽게 소리꾼의 길을 걸었다. 그러다가 10대 시절 여느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1950년대 큰 인기를 끌던 여성국극에 매혹됐다. 그래서 여성국극의 간판스타 임춘앵(1923~1971)이 1960년대 중반 단원을 모집할 때 입단했다. 1967년 여성국극 ‘선화공주’의 타이틀롤을 맡기도 했지만, 2년 남짓 활동하다 판소리로 돌아왔다.
“1960년대는 여성국극이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었을 때에요. 하지만 어릴 때 화려한 여성국극을 보고 설렜던 마음으로 단원이 됐어요. 비록 소리에 매진하기 위해 국악계로 돌아왔지만, 여성국극은 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홍성덕, 서라벌국악예술단과 한국여성국극예술협회 설립
남녀 혼성 창극만을 인정한 국립창극단이 1962년 설립된 데 이어 판소리가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돼 보존된 반면 공적 지원에서 배제된 여성국극은 1960년대 말 사실상 사라졌다. 홍 명창은 1980년대 들어 여성국극 부활을 위해 생존해 있던 여성국극인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1986년 여성국극인 20여 명과 함께 서라벌국악예술단을 창단하고 이듬해 첫 작품으로 ‘성자 이차돈’을 올렸다.
홍 명창은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성자 이차돈’을 올렸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이후 거의 매년 여성국극을 올렸다”면서 “‘황진이’로 1996년 호주와 미국 초청 공연, 2000년 노르웨이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시상식 축하공연, 2001년 북한 공연을 간 것도 잊을 수 없다”고 피력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무대 욕심 때문에 사재를 털어 공연 제작하느라 가족을 고생시켰다. 2000년대 초반엔 집까지 파는 바람에 2년 정도 가족이 옥상에서 텐트 치고 산 적도 있다”고 털어놨다.
여성국극에 헌신한 홍 명창의 최고 조력자는 바로 딸인 김 악장이었다. 김 악장은 어릴 적부터 창극 무대에 섰지만, 소리를 따로 배우지 않았다. 대신 고교 시절 시작한 한국무용으로 1991년 전주대사습놀이와 1993년 KBS국악대경연대회에서 입상할 만큼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권유로 다소 늦은 25세부터 판소리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성창순, 김영자, 김경숙 명창이 그의 스승이다.
김금미, 여성국극 배우에서 국립창극단 단원으로
“‘이모’라고 불렀던 여성국극 원로들에게 어릴 때부터 연기나 노래를 자연스럽게 배웠습니다. 이후 제가 소리가 아닌 무용을 할 때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는데요. 돌이켜보면 여성국극 배우에게 필요한 ‘태’를 갖추는 데 무용이 도움 된다고 생각하셨던 거 같아요.”(김)
김 악장은 1991년부터 어머니가 이끌던 여성국극 무대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했다. 대부분 여성 역할이었지만 ‘윤동주’에선 윤동주의 사촌 송몽규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리 무대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그는 1999년 35살의 나이에 국립창극단에 입단했다. 김 악장은 “몰래 치른 입단 시험에서 합격한 후 어머니에게 ‘서운해 말라’고 이야기했었다. 당시 어머니가 ‘잘했다’고 말씀하시면서도 속상해하던 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이에 홍 명창은 “딸이 여성국극을 잇길 바랐기 때문에 아쉬움이 있었다. 그리고 여성국극을 다시 누구에게 가르쳐야할지 생각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국립창극단에 입단한 김 악장은 2007년 전주대사습놀이 명창 부문에서 장원을 차지하며 소리로 인정받는 한편 다양한 역할을 소화했다. 특히 2016년 초연 이후 싱가포르, 미국, 영국, 오스트리아 등에서 공연된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주인공인 왕비 헤큐바 역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지난해 창극 ‘정년이’에선 정년이 엄마 채공선, 올해 ‘이날치’에선 조선 후기 명창 송흥록을 연기해 눈길을 끌었다. 김 악장은 “어머니는 과거 여성국극 작품들을 보존하고 공연하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나는 요즘 관객이 좋아하는 새로운 여성국극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어머니와 관점 차이가 있다”고 밝혔다.
박지현, 여성국극 주인공으로 첫 데뷔
김 악장의 딸인 박지현도 소리꾼의 핏줄을 이어받았다. 6살의 나이에 여성국극 ‘견우직녀’의 아역으로 데뷔한 그는 13살 때 오디션을 통해 국립창극단 ‘아비, 방연’에 딸로 캐스팅되며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번 ‘선화공주’는 그가 성인이 되어 처음 출연하는 여성국극이다. 어머니 김 악장과 함께 사랑하는 연인 사이인 선화공주와 서동을 연기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김 악장은 “어머니(홍 명창)의 무대 시집살이가 만만치 않다. 그래서 지현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 같다”고 걱정했다. 그러자 박지현은 “최근 여성국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할머니에게 의미가 큰 ‘선화공주’에 출연하게 돼 기쁘다. 다만 어릴 때 멋모르고 출연했던 것과 달리 지금은 판소리 전공자로서 부담이 크긴 하다”면서 “여성국극은 다양한 실험을 펼치는 요즘 국립창극단의 작품보다 더 전통적으로 느껴진다”고 밝혔다.
원래 1회만 예정됐던 특별공연 ‘한국 최초 여성 오페라, 전설(傳說)이 된 그녀들’은 예매 시작과 동시에 전석이 매진되고 공연 연장 요청이 쏟아지면서 2회가 더 추가됐다. 이외에 최근 드라마 ‘정년이’를 계기로 여성국극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높아지자 몇몇 공연장에서 내년 관련 프로그램을 기획 중이다. 홍 명창은 “예전에 여성국극을 국가지정무형문화유산으로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여성국극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그동안 많이 바뀐 만큼, 다음엔 지정될 수 있도록 다시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