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 소리가 시끄럽다.”
시청각장애인 첼리스트 박관찬(37)씨가 연습 중 이웃에게서 받은 메모의 내용이다. 그는 듣지도 못하고 앞도 보이지 않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며 죄송하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걸 본 이웃은 “당신이 듣지 못하는 첼로 소리를 제가 대신 들어드리겠다”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박씨는 이런 사연을 26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시청각장애인 자유발언대회 ‘달팽이광장’에서 전한 뒤 첼로를 들었다. 그가 연주한 애니메이션 라이언 킹 OST ‘캔 유 필 더 러브 투나잇(Can You Feel the Love Tonight)’은 음정이 다소 불안정한 미숙한 연주였지만 관객의 마음에는 깊은 울림으로 남았다.
이날 실로암시청각장애인학습지원센터(센터장 정지훈)가 주최한 제3회 ‘달팽이광장’은 시청각장애인들이 자신의 아픔,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나누는 자리였다.
중증 난청인 김미정(40)씨도 피아노를 연주했다. 선율을 전하는 수어 통역사들이 손길도 분주해졌다. 현장에는 음성을 텍스트로 변환하는 STT시스템을 비롯해 음성증폭기 등 각종 보조기기도 비치됐다. 영락농인교회의 자원봉사자들도 수어 통역으로 참여하며 행사에 따뜻한 배려를 더했다.
발표는 각자가 겪은 진솔한 경험들로 채워졌다. 안양에 거주하는 배자경(64)씨는 응급실에서 의료진의 설명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경험과 청각장애로 인해 장시간 보청기를 착용하며 겪은 고통을 토로했다. 그는 “몸이 아플 때 느끼는 이중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라며 청력 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청각장애를 갖고 태어나 시력을 잃게 된 김지현(55)씨는 점자정보단말기 ‘한소네’를 통해 얻은 소통의 기쁨을 전하며, 이를 통해 더 깊이 연결된 시청각장애인들과 나눈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한소네는 단순한 기기가 아니라 소통의 다리”라며, 점자 기술을 배워 다른 장애인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뜻을 밝혔다.
발표 중에는 실로암센터의 다양한 프로그램과 활동 소개도 이어졌다. 시청각장애인 사회복지사 양희동(60)씨는 한소네 자조모임과 함께한 승마체험 및 제주도 여행에서 느낀 감동을 나누었다. 그는 “말의 부드러운 털을 만지고, 흑돼지에게 간식을 주는 경험은 단순한 여행을 넘어선 특별한 감각의 체험이었다”고 전했다.
실로암시청각장애인학습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조현상(32)씨는 클라이밍 체험에서 정상에 오른 순간을 회상하며 “함께하는 동료들과 도전한다면 불가능해 보였던 일도 이뤄낼 수 있다”고 말했다.
최희영(53)씨는 농맹인으로서 겪는 어려움과 이를 극복하는 도구들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농맹인의 보행을 돕는 흰지팡이 사용의 필수성을 강조했다. “흰지팡이는 내게 길을 안내하는 친구이자, 위험을 막아주는 방패 같은 존재다. 그것이 없다면 한 걸음도 나아가기 어렵다”며 “주변의 이해와 협조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근 계단에서 낙상사고를 당해 응급실을 방문했던 김복자(68)씨는 의료 현장에서 겪은 어려움과 의료진의 배려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의사와 대화하기 위해 준비한 메모지가 없었다면 정말 막막했을 것”이라며 의료진의 배려가 얼마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지 전했다. 이어 “의료계에서 장애 친화적인 환경이 확대되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국내 시청각장애인 박사 1호 조영찬(53)씨의 발언도 이어졌다. 그는 “나는 기억과 상상, 무의식 세계 등의 감각이 남은 ‘삼관인’”이라며 “내 언어 세계는 고독하지만 아름다운 우주로 기억과 상상 속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린다. 이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2부에서는 저녁식사와 함께 참가자들이 소통하며 교류하는 시간을 가졌다. 정지훈 실로암시청각장애인학습지원센터장은 “이번 행사가 시청각장애인들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껏 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2020년 국내 최초로 설립된 실로암시청각장애인학습지원센터는 이동 교육, 사례 관리 등 맞춤형 서비스를 통해 시청각장애인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글·사진= 김수연 기자 pro111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