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교회사] “내 손이 먼저 벌을 받아야 하리라”

입력 2024-11-25 05:30 수정 2024-11-28 16:21
안녕하세요. 더미션입니다.

어느덧 11월 마지막 주를 맞습니다. 올해도 한 달 정도 남았습니다. 연말연시 분위기에 휩쓸리기보다는 자신을 차분하게 돌아보면서 주님 앞에서 우리를 점검하면 좋겠습니다. 올 초 신앙 결심으로 했던 성경 통독이나 큐티, 필사 등도 한 달 사이 ‘숙제’를 열심히 하면 좋겠네요. 끝이 좋으면 다 좋으니까요.

지난 주말 동네 도서관에 갔더니 사람들이 북적였습니다. 한강 신드롬일까요? 그건 아닌 것 같고요. 기말시험 준비에 나선 학생들이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책을 한 쪽에 쌓아둔 학생들, 노트북에 모니터 하나를 더 설치해 놓고 인강을 듣는 학생과 취준생, 또 공부하다 지쳐 잠시 눈을 붙인 학생들도 여럿 보였고요. 이번 주는 한 해를 정리하기 위한 몸풀기 주간으로 삼아보면 어떨까 합니다.

‘이번 주 세계교회사’는 이번 주를 끝으로 1년 시리즈를 마감합니다. 시리즈는 지난해 12월 첫 주부터 시작해서 52주를 보냈습니다. 아쉬움이 큽니다. 더 준비해서 맛있는 상을 차려드려야 했는데 한 주 한 주 허덕이며 정리하다 보니 빠진 게 많습니다. 명색이 ‘세계 교회사’인데 내용의 90%는 영국과 미국 위주의 교회사가 많았습니다. 이점 독자 여러분의 넓은 아량과 양해를 구합니다. 세계 교회사 시리즈는 ‘더미션’ 홈페이지 맨 아래 를 클릭하시면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번 주 날씨는 비와 눈이 예보돼 있습니다. 따뜻한 하루하루 보내시길 바라면서 우리 주님의 평안을 빕니다.



1862년 11월 26일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노예제 폐지론자이자 저명한 목사인 라이먼 비처의 딸인 해리엇 비처 스토를 만납니다. 링컨은 그녀를 만나자마자 “이 위대한 전쟁을 일으킨 책을 쓴 작은 여성이 바로 당신이군요!”라고 말했습니다.

1883년 11월 26일 전도자이자 노예제 폐지 운동가인 소저너 트루스(본명은 이사벨라 반 와게너)가 미시간주 배틀 크릭에서 사망합니다. 노예로 태어난 트루스는 환상과 환청을 경험했는데, 이를 하나님에게 돌렸으며 당대 가장 카리스마 넘치는 노예제 폐지론자이자 참정권 운동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십자군 전쟁 선포
1095년 11월 27일 9일간의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반 2세는 대중 앞에서 연설을 통해 1차 십자군 전쟁을 선포합니다. 목표는 무슬림의 침략으로부터 동방 기독교인을 보호하고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더 안전하게 하며 성묘를 탈환하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셀주크 투르크가 비잔틴제국으로부터 소아시아 대부분을 빼앗자, 위기에 처한 비잔틴제국 황제는 사절을 보내 교황에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그리스를 도와달라고 청했습니다. 교황 우르반 2세는 1095년 클레르몽에서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가 박해받고 있다고 성지 탈환을 호소했으며 “하나님이 이를 원하신다”(데우스 불트·Deus Vult)는 말로 연설을 마쳤습니다. 이 말은 이후 십자군 원정의 구호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절을 파견해 봉건 영주들이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도록 설득했습니다.


‘실낙원’ ‘신곡’ 삽화를 그린 윌리엄 블레이크
1757년 11월 28일 영국의 기독교 신비주의자 윌리엄 블레이크가 런던에서 태어납니다. 시인이자 조각가, 화가인 그는 학교에 다니지 않았지만 존 밀턴, 윌리엄 세익스피어, 단테 알리기에리 그리고 성경에 매료되었습니다. 네 살 때 창문 너머로 하나님이 보이는 환상을 본 것을 시작으로 그는 평생 환상을 경험하며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블레이크는 그 이름 앞에 수식어가 많습니다. 신비주의자 몽상가 성자 시인 예언자 화가 삽화가 심지어 미치광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블레이크는 마음속에 그리던 환상을 기초로 괴물 같고 악마 같은 형상을 묘사한 ‘벼룩 유령’을 그렸습니다. 이 작품은 전무후무했고 그림을 본 사람들은 화가가 온전한 정신을 가졌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블레이크는 우아한 선의 사용과 선명한 색채, 그리고 기상천외한 형상과 엉뚱한 상상력으로 매혹적인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미술계의 평가를 받습니다.

블레이크는 미술가뿐 아니라 작가로서도 유명했습니다. 1808년 존 밀턴의 ‘실낙원’(1667)에 삽화 작업을 했고, 자신의 시집 ‘순수의 노래’(1790)에도 삽화를 그렸습니다. 그는 본문에 삽화를 곁들여 본문의 의미를 강화하거나 때로는 달라지게 했습니다. 블레이크는 당대 유행하던 아카데미 미술을 배척했다고 합니다. 오히려 알브레히트 뒤러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같은 전성기의 르네상스 화가들의 작품을 좋아했습니다. 대가들의 작품은 그가 선호했던 고딕적 선의 사용과 함께, 그의 미술적 착상을 돕는 좋은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삽화로 들어간 윌리엄 블레이크의 그림으로 성직 매매를 그렸다.

블레이크는 독실하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천사와 성경 속 예언자들, 그리고 성령의 환상을 실제로 보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블레이크는 영적 헌신으로 ‘욥기’의 삽화를 그렸는데 그의 신앙적인 견해는 매우 개인적인 것이었고 당시 교회의 관습과는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른바 예언서인 ‘유리즌의 서’(1794)와 같은 작품을 쓰기도 했는데 거기서 자신만의 신화를 창조했습니다. 블레이크는 만년에 단테의 ‘신곡’에 100매의 삽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최초의 국가 추수감사절
1863년 11월 28일 최초의 국가 추수감사절이 기념되었습니다. 한 달 앞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매년 11월 넷째 주 목요일을 국가 추수감사절로 선포했습니다. 추수감사절 역사는 1621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해 종교적 자유를 위해 영국을 떠난 청교도들은 매사추세츠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혹독한 겨울을 거치면서 그 중 절반가량이 목숨을 잃게 되자 청교도들은 주변에 살던 인디언 원주민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인디언들은 그들에게 옥수수와 다른 작물들을 재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고, 이듬해 많은 수확을 거두자 청교도들은 감사하는 의미에서 추수감사절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첫 추수감사절'(The First Thanksgiving) 그림.

추수감사절 저녁에 먹는 음식들은 지금도 과거의 전통을 계속 유지하고 있습니다. 구운 칠면조 요리와 크랜베리 소스, 감자, 호박파이 등을 먹습니다. 추수감사절에는 저녁 식사를 하기 전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함께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을 감사드리며 자신들이 받은 축복을 감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1780년 11월 29일 코네티컷 회중 교회는 르무엘 헤인즈에게 설교를 허가해 백인이 주류를 이루는 교단에서 인준을 받은 최초의 흑인 목사가 되었습니다. 헤인즈는 나중에 백인 교회를 목회한 최초의 흑인 목사가 되었습니다.

1950년 11월 29일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27개 개신교와 7개 동방 정교회 교단이 모여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 전국협의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이 단체는 사회 정의를 위해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적 목소리를 내온 단체 중 하나입니다.

피의 메리와 순교자들
1554년 11월 30일 영국 여왕으로 즉위한 헨리 8세의 딸 메리 튜더가 영국에 로마 가톨릭을 복원합니다. 이후 토머스 크랜머, 휴 라티머, 니콜라스 리들리 등 300명에 가까운 개신교도들이 ‘블러디 메리(Bloody Mary)’에 의해 화형에 처해집니다. 이 일련의 사태에서 400여명이 투옥과 굶주림으로 사망했습니다.

메리 튜더는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충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사촌 카를 5세와 보수적 주교들이 튜더를 강력하게 지원했습니다. 그녀는 사촌인 스페인의 필립과 결혼, 가톨릭의 합스부르크가와의 유대를 공고히 했습니다.

왕위가 견고해진 뒤 메리 튜더는 개신교도들을 억압하기 시작했습니다. 1554년 잉글랜드는 공식적으로 교황에 대한 충성을 서약했습니다. 헨리와 에드워드 재위 기간에 이루어진 대부분의 개신교 조치가 철회됐습니다. 성인들의 축일도 복구되었고 결혼한 성직자에게는 아내를 내보내라는 명령도 내려졌습니다. 개신교 지도자들에 대한 박해도 이어져 처형과 투옥, 유배, 망명길을 떠난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오늘까지도 그녀에겐 ‘피의 메리’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메리 튜더 시대 가장 유명한 순교자는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토머스 크랜머입니다. 로마가톨릭은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의 허수아비를 불태웠습니다. 메리 튜더 여왕은 개혁파의 우두머리인 크랜머에게 (개신교) 철회 서약을 받아내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정신적 패배를 안겨주려 했습니다. 이 때문에 크랜머는 자신의 동지였던 라티머와 리들리 감독이 화형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결국 크랜머는 철회 서약서에 서명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처형 직전 그는 공개 철회 성명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철회를 다시 취소했습니다. 그리고 화형당할 때 자기의 손을 먼저 불 속에 넣었다고 합니다. 그가 했던 말은 이렇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으로 생각했던 진리와는 다른 것으로, 죽음의 공포 때문에 생명을 구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내가 진심으로 믿는 것과 반대되는 사실들을 종이에 써야 했던 내 손이 먼저 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불길 속으로 들어갈 때 이 손들을 먼저 태워야 할 것입니다. 나는 또한 그리스도의 적이자 적그리스도인 교황을 그의 모든 거짓된 가르침들과 함께 거부합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