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눈뜨면 ‘내가 살고 있는 오늘이 우리 아들이 살고 있어야 할 미래였는데’란 생각부터 들었어요. 배가 고픈 것도, 잠이 오는 것도 죄책감이 들었고 어쩌다 TV를 보다 웃음이 날 때면 웃고 있는 나를 아들이 하늘에서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 싶어 죽고 싶었지요.”
“아내의 죽음이 아직 믿기지도 않은 상황인데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 ‘세상이 날 버렸구나’싶은 생각뿐이었어요. 장례도, 그 후도 막막하고 캄캄하기만 하고···”
취재 현장에서 만난 자살 유가족들이 마음 속 밑동에서 힘겹게 건져 올린 고백들입니다. 자살 유가족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애도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겪는 상황 중 하나는 기본적인 욕구와 일상적인 행복조차 죄책감 때문에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어떤 죽음도 슬프고 두렵지 않을 수 없겠지만 죽음 후 남겨진 이들에게 ‘자살’이 주는 충격은 그 깊이와 범위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큽니다.
영어로 ‘수어사이드 서바이버(Suicide survivor)’는 자살 생존자를 뜻하는 동시에 자살 유가족을 의미합니다. 자살을 시도했다가 구조되어 생존한 이들만큼이나 그들의 주변인 또한 생존을 위협받을 정도로 심리적 타격을 입은 채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일 겁니다.
현장에서 만난 유가족들은 충분하지 못한 애도 과정, 사회적 낙인, 부족한 지원 등으로 인해 언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를 현실을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 속엔 그야말로 생존 싸움 하듯 ‘서바이벌(survival)’ 환경에서 고립돼가는 또 하나의 ‘자살 고위험군’이 엿보였습니다.
11월 23일은 세계 자살 유가족의 날이었습니다. 매년 11월 셋째 주 토요일에 전 세계 공통적으로 보내는 이 날은 자살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가족들을 기억하고 지지하며, 그들의 슬픔을 공유하고 치유를 도모하기 위해 제정한 날입니다.
이날 서울 대학로의 한 공연장에선 자살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이들의 사연이 연극 무대에 올려졌습니다. 작품의 이름은 ‘우리가 죄인입니까’. 질문이나 반문, 또는 한서린 하소연으로도 들리는 문장입니다. 무대에선 자식 엄마 연인 친구 등을 자살로 잃은 10명의 이야기가 낭독극으로 펼쳐졌습니다. 죄책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자살 사별자들의 고백이 또 다른 사별자들과의 서사와 만나며 위로와 치유로의 물꼬를 뜨는 과정을 녹여냈습니다. 농도 짙은 낭독은 관객들의 가슴에 한 문장을 새겼습니다.
“죽음이라는 점인 줄 알았는데, 삶이라는 선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엔 점 하나 찍듯 ‘자살’이란 죽음을 낙인찍고 남은 생명들을 고립으로 내모는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비극적인 죽음 앞에서 어느 때보다 위로가 필요한 유가족들이 ‘고인을 향한 정죄’ ‘장례 거부’ 등으로 2차 피해를 입고 평생을 몸 담았던 신앙 공동체를 떠나기도 합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는 말씀을 붙들고 배려와 사랑이 바탕된 시선으로 유가족들을 바라보는 인식 전환이 교회부터 필요한 이윱니다.
반가운 사실은 유가족들의 마음을 다독이며 소중한 삶으로 선을 이어주는 이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용기 내어 같은 아픔을 겪은 이들과 연대하며 필요한 목소리를 내는 유가족들의 활동도 동력을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도움이 전달되도록 유족지원센터 설립을 위한 운동도 멈춤 없이 진행 중입니다. 남은 것은 지속적 관심과 행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인류를 구한 것처럼, 시대를 끌어안는 사랑이 사람을 구합니다.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