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우리 그때 못했던 장기기증 서약 할까?”
어쩌다 장기기증 이야기를 꺼낸 걸까. 박지희(26)씨는 가끔 그날의 기억을 곱씹어본다. 엄마 김연화(사망 당시 58세)씨와 나란히 앉아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다시 보던 때, 하필 장기기증 관련 에피소드가 방영되던 그 순간을. 모녀는 그날 한국장기조직기증원 홈페이지에 접속해 서약서를 작성했다. 지난해 1월, 김씨가 사망하기 11개월 전의 일이다.
평소 대화가 많던 모녀는 드라마를 보기 전에도 장기기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김씨는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당연히 해야지”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던 딸이 불쑥 꺼낸 말에도 그는 흔쾌히 동의했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장애를 안고도 습관처럼 베풀던 김씨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나눠야 한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김씨의 결심은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현실이 됐다. 그는 지난해 11월 말 갑작스러운 출혈 증세를 보이다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이송됐고, 일주일 만에 뇌사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고려대 안산병원에서 심장, 간장, 좌우 신장을 4명에게 기증하고 세상을 떠났다.
삶 바꾼 교통사고… 그래도 굳세었던 ‘엄마’
박씨에게 김씨는 삶의 굴곡을 묵묵히 이겨낸 ‘철인 같은’ 엄마였다. 엄마는 10대 시절 겪은 교통사고의 기억을 들려줄 때도 덤덤했다. 박씨에 따르면 김씨는 고향인 강원도 양양의 한 횡단보도에서 길을 걷다가 돌진하는 차량에 치였다. 보닛에 허리가 꺾인 상태로 꽤 긴 거리를 끌려갔다던 김씨는 당시 서울까지 이송돼 수술을 받아야 했다.
큰 사고는 김씨에게 허리가 옆으로 휘는 후유증을 남겼다. 일상생활도 쉽지 않았다. 박씨는 “엄마가 조금 먼 거리에 있는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것도 힘들어해서 잠깐 쉬었다 가곤 했다”고 말했다. 사람들의 시선도 견뎌야 했다. 함께 길거리를 걸을 때마다 안쓰러워하는 듯한 사람들의 시선을 박씨도 느꼈다고 한다. 김씨는 그런 시선을 피하려 늘 자신의 몸보다 큰 치수 옷을 즐겨 입었다.
하지만 하나뿐인 가족인 딸 박씨를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는 엄마였다. 마트 직원, 환경미화원 등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했다. 김씨와 동네 이웃으로 인연을 맺고 15년 넘게 우정을 이어온 서모(54)씨는 “딸밖에 몰랐던 엄마”라며 “본인의 옷은 사지 않아도 딸에게는 부족함 없이 해주려고 노력했다”고 기억했다. 김씨와 가까웠던 직장 동료 A씨도 “업무 환경이 고된 편이었는데 딸을 위해 꿋꿋하게 일하곤 했다”고 말했다.
늘 타인을 향했던 ‘시선’… 다정했던 사람
김씨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다정함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다. 박씨는 “도움이 필요한 곳에 항상 시선을 두던 분”이라고 말했다. 살가운 성격 때문에 마트 손님들과도 쉽게 친해졌다.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망설임 없이 나섰다고 한다. 허리가 불편해 자신이 도울 수 없을 땐 딸 박씨에게 “네가 가볼래?”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 엄마를 딸도 닮아갔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던 2014년, 박씨는 단원고 1학년 학생이었다. 선배들의 사고 소식에 학교 전체가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수업도 하지 못하고 강당에 모여 실시간으로 사고 현황, 수습 과정을 지켜봤다. 박씨는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선배들의 교실이 있는 복도에 책상을 가져다 둔 뒤 ‘추모 메시지를 적어달라’는 안내문을 붙이고 포스트잇과 볼펜 등을 비치했다. 재학생들은 물론이고 추모하러 온 시민들도 메시지를 남기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추모 메시지가 적힌 포스트잇으로 2학년 교실의 벽이 뒤덮였다. 박씨는 “부족한 포스트잇과 펜을 집에서 추가로 준비하는 제 모습을 본 엄마가 사실을 알고는 ‘참 잘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니’라며 칭찬해줬죠”라고 그때를 떠올렸다.
철인 같은 엄마도 무장해제되는 순간이 있었다. ‘미스터트롯 시즌2’ 우승자인 가수 안성훈씨 노래를 들을 때다. 김씨는 안씨가 시즌 1에 출연했을 때부터 열렬한 팬이었다고 한다. 제일 좋아하던 안씨의 노래는 ‘잠깐이라도’. ‘잠깐이라도 나를 바라봐 준다면, 잠깐이라도 그댈 볼 수만 있다면’이라는 가사가 반복되는 곡이다. 박씨는 “‘벨소리로 해줄까’라고 하니 아이처럼 기뻐하던 엄마 모습이 생각난다”고 추억했다.
“다시 보자” 약속 못 지키고… 마지막이 된 통화
김씨가 장기기증 서약을 했다고 말하던 날 서씨는 ‘음식 하나라도 나누고 싶어하던 언니답다’고 생각했다. 대단하단 생각과 함께 내심 걱정은 됐지만 먼 미래의 일 같아 현실감은 없었다. “그 작은 몸에 기증할 장기가 어디 있다고”라는 농담으로 웃어 넘겼다.
김씨가 쓰러지기 일주일 전, 여느 때처럼 만날 약속을 잡으려고 전화를 했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이상한 조짐이 있었다. 김씨는 얼마 전부터 코와 입에서 출혈이 있어서 입원까지 했지만 부비동 쪽에 이상이 있다는 것 외에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일을 더 쉴 수 없어 퇴원했다면서도 “몸이 안 좋으니 나중에 보자”며 전화를 끊었다.
그 통화가 마지막이었다. 김씨는 외래 예약을 하루 앞두고 안산의 한 예식장에서 청소 일을 하다가 갑자기 코피를 흘렸다. 동료 A씨의 도움을 받아 급히 병원에 갔지만 코피 외엔 별다른 증상이 없고, 다음 날 외래도 있으니 일단 귀가하기로 하고 병원을 나왔다. A씨는 그때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사람이 감이라는 게 있잖아요. 아픈 게 반복되는 걸 보면 뭔가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김씨는 집에 오자마자 다시 출혈 증세를 보였다. 딸 박씨는 곧장 119에 신고했다. 그렇게 병원으로 이송된 김씨는 일주일 만에 저산소성 심정지에 의한 뇌사 판정을 받았다.
“딸 걱정은 조금 덜고, 이제는 편안하길”
출혈이 왜 생겼던 건지, 갑작스러운 심정지가 왜 왔던 건지 박씨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그저 장기기증을 위한 각종 검사와 이식 수술, 장례식 등 여러 절차가 급박하게 진행되는 상황 속에서도 ‘엄마의 뜻(장기기증)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텼을 뿐이다.
오랜 친구를 잃은 서씨에게도 김씨의 죽음은 여전히 큰 충격이다. 이식 수술을 하던 날 임종 면회를 갔던 서씨는 평소와 달리 반질반질한 김씨의 이마를 한참 매만졌다. “이제 좀 편해보이네”라며 “이 작은 몸에서 기증할 게 뭐가 있다고”라며 10여개월 전 농담 같았던 말도 다시 꺼냈다.
박씨는 아직도 쓰러진 엄마 곁에서 구급대원을 기다리던 날의 죄책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학교에서 배웠던 심폐소생술(CPR) 방법을 아무리 떠올려도 머리가 멍했고, 온몸이 굳어 움직이지도 못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워서다. 그는 “‘그때 심폐소생술을 했더라면 엄마가 살 수도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도 김씨 뜻대로 장기기증을 했다는 것에 위안이 된다고 했다. “어쩌면 엄마가 지금쯤은 편안해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들어요”라고 말했다.
“엄마, 평소에 잘 못 잤는데 이제는 잠도 푹 자고. 우리 해외여행도 가자고 말만 하고 못 갔는데 가고 싶은 곳 어디든 가고. 나는 아직 괜찮지 않지만, 다행히 곁에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서서히 나아지고 있어. 그러니까 이제는 내 걱정 조금 덜고 항상 나만 바라봤으니까 엄마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면 좋겠어.”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