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통음악의 본산인 국립국악원과 국립극장은 올해 나란히 게임음악 연주에 나섰다. 먼저 국립국악원이 지난 5월 국립국악원 게임 사운드 시리즈’에서 게임음악을 국악으로 편곡한 싱글 음반을 내놓았다. 국립국악원 단원들과 실력파 뮤지션들이 참여한 음반에는 ‘P의 거짓’ ‘메이플스토리’ ‘로스트아크’ ‘블레이드&소울’ ‘리니지’ ‘아이온’ 등 13개 게임의 인기 있는 테마곡과 BGM이 수록됐다. 기존 게임음악에서 경험하지 못한 어쿠스틱 사운드의 입체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음원은 국립국악원 국악아카이브 포털과 전 세계 주요 음원 플랫폼에도 공개됐다.
그리고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오는 29~30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관현악 시리즈의 하나로 게임음악 콘서트 ‘음악 오디세이: 천하제일상’을 선보인다. 온라인 게임 ‘천하제일상 거상’과 협업한 이번 공연은 게임 OST를 단순히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작곡가들에게 새로운 음악을 의뢰한 뒤 승부를 겨루는 것이 특징이다.
‘천하제일상 거상’은 16세기 아시아를 배경으로 무역과 전투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최고의 상인이 되는 과정을 다룬 게임이다. 이번 공연을 위해 게임 속 조선, 일본, 대만, 중국, 인도 등 5개 필드를 각각 배정받은 작곡가 5명이 각 필드의 주요 선율을 활용해 새로운 음악을 만들었다. 승부는 공연 당일 관객의 실시간 현장 투표로 결정되며, 1위를 차지한 작품이 앙코르 무대를 장식하며 작곡가에게 상금이 수여된다. ‘천하제일상 거상’은 이번에 연주된 작품을 추후 게임 OST로 다시 활용할 계획이다.
국악계, MZ 세대에게 게임음악 통해 다가가
국립국악원과 국립극장이 게임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국악을 어렵다고 느끼는 MZ 세대의 선입견을 허물기 위해서다. 어린 시절부터 게임이 생활화된 MZ 세대에게 친숙한 게임음악을 국악으로 들려줌으로써 한층 가깝게 다가설 수 있다. 국립국악관현악단도 지난 2021년부터 ‘소년소녀를 위한 소소 음악회’에서 모바일게임 ‘쿠키런: 킹덤’ ‘크레이지레이싱 카트라이더’의 BGM을 국악관현악으로 편곡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게다가 게임의 위상이 계속 높아지는 것도 국악계가 러브콜을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게임 전문 글로벌 시장조사 기관인 뉴주(Newzoo)는 2023년 기준으로 게임을 즐기는 인구가 약 11억 명이라고 추정했다. 또 게임 시장의 규모는 약 1839억 달러(한화 약 257조 원)로, 글로벌 박스 오피스 기준 극장 매출액인 약 540억 달러(약 75조 원)의 3.4배나 된다.
게임은 오랫동안 불건전한 놀이로 여겨졌지만, 사회적 인식 변화에 따라 이제는 전 세계에서 예술로 인정받고 있다. 실제로 게임은 이미지, 영상, 사운드, 음악, 서사 등 다양한 미적 요소가 혼합돼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21세기 들어 일본, 프랑스, 미국 등에서 게임이 예술에 포함되는 조치가 이뤄진 데 이어 한국에서도 2022년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으로 대중 문화예술에 포함됐다.
게임음악 인기는 게임음악 콘서트의 등장으로
게임이 예술로 인정받게 된 배경으로 게임계 밖에서 먼저 인정받았던 게임음악의 인기를 꼽지 않을 수 없다. 1970년대 게임이 처음 등장한 초창기엔 단순한 기계적 효과음 정도에 머물렀지만, 점차 실력 있는 작곡가들의 참여로 완성도 높은 게임음악이 만들어졌다. 특히 일본은 게임음악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1984년 게임 ‘제비우스’에는 세계적인 전자음악 그룹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의 멤버 호소노 하루오미가 참여했다. 당시 게임 OST로는 처음 CD 발매가 이뤄졌으며 라디오 음악방송에 소개됐다. 이어 1986년 게임 ‘드래곤 퀘스트’의 작곡가 스기야마 고이치는 클래식 선율을 바탕으로 한 웅장한 OST로 게임음악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1999년 우에마츠 노부오가 작곡한 게임 ‘파이널 판타지 VIII’ 주제가 ‘아이즈 온 미’(Eyes on Me)는 오리콘 차트 19주 1위 기록에 이어 게임음악 최초로 ‘올해 최고의 음악’으로 선정됐다.
미국과 유럽에서도 재능있는 게임음악 작곡가들이 속속 등장했다. ‘영화음악의 황제’ 한스 짐머도 2009년부터 게임음악 작곡에 나선 상태다. 특히 2011년 크리스토퍼 틴이 작곡한 게임 ‘문명 IV’의 주제가 ‘바바 예투(Baba Yetu)’가 미국 그래미상을 받으면서 게임음악의 위상에 더 의문을 제기하지 않게 됐다.
게임음악의 인기는 자연스럽게 게임음악 콘서트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게임음악 콘서트는 일본에서 1987년 ‘드래곤 퀘스트 콘서트’가 처음 열린 이후 1990년대 ‘파이널 판타지 콘서트’의 인기와 함께 일반화됐다. 구미에서도 2003년 독일에서 ‘심포닉 게임음악 콘서트’, 2004년 미국에서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파이널 판타지 콘서트’를 시작으로 주요 오케스트라와 공연장이 게임음악 콘서트를 열고 있다.
게임음악의 위상에 뒤늦게 눈뜬 국내 공연계
한국에서는 2000년대 들어 넥슨, 엔씨소프트 등 게임 제작사들이 게임음악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국내외 역량 있는 작곡가들을 참여시켰다. 그리고 게임음악 콘서트도 2002년부터 게임 유저들을 타깃으로 꾸준히 열려 왔다. 하지만 게임업계 중심으로 기획되다 보니 주류 공연계에선 게임음악 콘서트를 잘 알지 못했다. 해외와 달리 국내 주요 오케스트라나 공연장은 게임과 게임음악 자체에 무관심했다.
2017년 국내 주요 오케스트라 가운데 하나인 코리아 심포니 오케스트라(현재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국산 게임 OST를 연주한 ‘게임 속의 오케스트라’를 선보인 것과 지휘자 진솔이 게임음악 전문 연주를 목표로 플래직 게임 심포니 오케스트라(현재 플래직)를 만든 것은 게임음악과 공연계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다. 플래직은 지금까지 게임음악 분야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단체다.
지난 2021년 4월 서울 세종문화회관과 라이엇 게임즈 공동주최로 KBS 교향악단이 연주한 ‘리그오브레전드 라이브: 디 오케스트라’는 주류 공연계에 게임음악 콘서트의 위력을 알리는 결정타가 됐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거리두기가 적용돼 3000석 가운데 1700석만 팔 수 있었지만 이틀간 티켓 3400매가 판매와 동시에 완판됐다. 당시 티켓 예매자의 70%는 평소 공연장에서 보기 어려운 20~30대 남성이었다. 이후 국내 여러 공연장과 오케스트라가 게임음악 콘서트를 열기 시작했다.
최근 국악 활용한 게임음악도 잇따라 등장
클래식 음악보다 빈도는 훨씬 낮지만 그동안 국악도 게임음악과 만나 왔다. 2001년 공포 게임 ‘화이트데이’가 황병기의 ‘미궁’을 사용한 것을 시작으로 최근에는 2022년 엔씨소프트 ‘길드워2’의 신규 확장팩 ‘엔드 오브 드래곤즈’와 2023년 펄어비스 ‘검은사막’의 신규 확장팩 ‘아침의 나라’가 국악을 활용한 게임음악을 만들었다.
그런가하면 기존 게임음악을 국악으로 편곡해 연주하는 콘서트도 열렸다. 2017년부터 성남시와 게임문화재단 주최 행사에서 게임음악 콘서트를 열어온 성남시립국악단이 대표적이다. 이것은 성남이 넥슨, 엔씨소프트, 네오위즈 등 한국 게임산업을 이끄는 회사들이 판교에 입주해 있는 것과 관련있다. 올해도 성남시립국악악단은 지난 9월 게임축제 ‘GXG 2024’에서 게임음악을 연주했다.
성남시립국악단에 이어 국립국악원과 국립국악관현악단까지 게임음악에 뛰어들면서 국악계의 게임음악 콘서트가 이제부터 많이 열릴 것 같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