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은인, 조지 오글 목사 기일에 언급 ‘사라진 금반지’ 어디에?

입력 2024-11-15 15:48 수정 2024-11-15 16:03
김영주 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 이사장이 15일 서울 종로구 기감 본부교회에서 열린 조지 오글 목사 4주기 추도예배에서 추도사를 전하고 있다.

외국인 선교사로서 독재정권의 억압 속에서도 한국 민주화와 인권 보호를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했던 고(故)조지 오글 목사(1929-2020)의 헌신이 재조명됐다. 오글 목사의 4주기 추도예배가 15일 서울 종로구 기독교대한감리회 본부교회에서 열렸다.

오글 목사는 1954년 부인 도로시와 함께 미연합감리교회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그는 인천도시산업선교회를 설립하며 노동자의 권리와 노동법 교육에 힘썼다. 한국에서 20여년간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사회 정의와 인권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특히 1970년대에 한국과 캐나다 선교사들로 구성된 ‘월요모임’을 통해 민주화운동을 지원했다.

1974년 발생한 인혁당 사건은 그의 삶이 전환점이 됐다. 인혁당 사건은 1974년 박정희 정권이 독재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다. 당시 관련자들에게는 간첩 혐의가 씌워져 사형 선고가 내려졌고 대법원 확정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훗날(2005년)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이 사건이 정권에 의해 상당 부분 조작됐다고 밝혔다.

오글 목사는 사건의 진실을 파악한 뒤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알리고 생명을 구하기 위해 기독교회관에서 목요기도회를 열었다. 그는 설교에서 “예수님은 우리 중 가장 약한 자를 통해 우리에게 오신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호소하며 피해자들이 사형에 이를 만한 죄를 짓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박정희 정권의 심기를 건드렸고, 그는 곧바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20시간 동안 심문을 받으며 거짓증언을 강요 받았다.

조지 오글 목사가 1974년 12월 14일 추방 당시 비행기 트랩에 오르며 만세를 부르는 모습.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정권에 의해 강제 추방 명령을 받은 오글 목사는 한국을 떠나는 비행기에서 “대한민국 만세, 하나님과 함께”라고 외치며 한국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추모예배에서는 해당 내용이 담긴 다큐멘터리가 상영됐다. 오글 목사의 추방 당시 한 여인이 그에게 다가와 손에 작은 금반지를 끼워준 대목은 다큐멘터리의 백미였다. 그 여인은 사형 선고를 받은 인혁당 사건 관련자 우홍선씨의 아내 강순희씨였다. 그녀는 “반지를 팔아 길에 쓰세요”라며 반지를 전했다. 오글 목사는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이 반지를 손에서 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미 의회 청문회와 전미 강연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알리며 진실을 밝히는 신념의 표식으로 삼기도 했다.

이날 추모 예배에서 김영주 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 이사장은 고인의 사망 1년 전 미국 덴버에서의 만남을 회고하면서 “한국 기독교 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물건이어서 꼭 전시하고 싶었지만, 일찍 돌아가시라는 말로 오해할까 봐 주춤거리고 말을 꺼내지 못했다”고 밝혔다. 김 이사장은 “지금 반지의 행방이 묘연하다”며 “오글 목사님 자녀에게 연락해서 한국의 기념품으로 전시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어 “4주기를 기억하면서 기억이 기억으로 끝나지 않고, 오늘과 내일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다짐의 시간으로 삼길 바란다”며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도록 다짐하는 계기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편 1989년 한국을 방문한 오글 목사는 반지와 관련한 경험을 담아 ‘기적의 가운데’를 출간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도 초청되는 등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2002년에는 한국인권문제연구소로부터 한국인권상을 수상했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역사소설 ‘기다림은 언제까지 오 주여!’를 출간하며 한국 민주화운동의 이야기를 담았다. 오글 목사는 생전에 이 금반지를 언젠가 한국에 기증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왔다.

조지 오글 목사.

글·사진=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