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여대 아닌 ‘숙면여대’… 교수님이 속삭이는 ASMR 화제

입력 2024-11-09 07:01
숙명여대 마스코트 ‘눈송이’ 인형을 쓰다듬고 있는 화공생명공학부 권우성 교수. 숙명여대 유튜브 영상 캡처

“이런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려드린다는 게 굉장히 부끄럽네요. 그래도 졸지 말고 잘 집중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숙명여자대학교 유튜브 채널에서 ‘교수님의 ASMR’로 소개된 영상을 클릭하자 이 학교 화공생명공학부 권우성 교수가 마이크에 입을 가까이 대고 귓속말을 하듯 속삭였다.

인사말을 마친 그는 숙명여대 마스코트 ‘눈송이’ 인형을 마이크 앞에서 쓰다듬어 사사삭 소리를 냈다. 이어 카카오프렌즈 캐릭터 인형과 그림책 ‘월리를 찾아라’의 월리 피겨를 손으로 스윽스윽 비비거나 탁탁 두드렸다. 자신이 대학생 때 공부했다는 두꺼운 책을 바스락거리며 한 장씩 넘기기도 했다. 다양한 마찰음이 선명하게 전달됐다.

자율감각쾌락반응의 영문 약자인 ASMR은 미세하고 부드러운 소리 등에 뇌나 몸이 느끼는 편안함이나 쾌감을 말한다. 시각적 자극도 포함하는 개념이지만 일반적으로는 듣기 좋은 백색소음을 가리킨다.

여러 소리로 ASMR을 일으킨 권 교수는 전공 분야로 돌아가 초미세 나노 소재 ‘양자점’(퀸덤닷)을 속삭이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석 달 전 올라온 이 영상은 8일 기준 거의 40만 조회수를 기록했다.

“ASMR에 강의 접목하면 어떨까” 학생 영상팀 작품
지난 7월부터 ‘팅글의 정석’이라는 시리즈로 연재되는 이 ASMR 콘텐츠는 숙명여대 재학생 영상제작팀 ‘숙튜디오’가 기획·제작한 영상이다. 흥분감을 의미하는 팅글(tinlge)은 ASMR로서 나타나는 자극을 가리킨다.

‘팅글의 정석’ 촬영 현장 모습. 숙튜디오 노연주씨 제공

팅글의 정석은 교수가 자신의 애장품 서너 개를 소개하며 팅글 소리를 낸 뒤 전공 지식을 속삭이며 설명하는 것이 기본 형식이다.

숙튜디오 창립멤버 이지연(25)씨는 고요함 속에서 소리에 집중할 수 있는 ASMR에 교수님 강의를 접목하면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으로 영상을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처음엔 재밌을 것 같아 영상을 클릭했지만 재밌는 전공 지식을 자신도 모르게 얻어가며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걸 의도했다”며 “그래서 ASMR 속 강의 내용도 비전공자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가벼운 내용”이라고 말했다.

교수 섭외부터 삐걱… 다들 “부끄럽다” 손사래 칠 때
영상 제작 초반에는 교수를 섭외하는 것부터 쉽지 않아 준비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ASMR에 대해 잘 모른다거나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어색하다는 이유 등으로 많은 교수가 출연을 거절했다. 첫 타자 권우성 교수의 출연이 아이디어 단계에서 폐기될 뻔한 콘텐츠를 살려낸 셈이다.

숙튜디오 학생이 촬영을 준비하고 있다. 숙튜디오 노연주씨 제공

권 교수는 ‘팅글의 정석’ 선발주자로 큰 인기를 얻었지만 그전까진 ASMR 영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이씨는 “첫 번째로 촬영에 응해주신 권 교수님은 학생들이 하는 활동이라면 거의 다 참여해주실 만큼 친근한 분”이라며 “이번에도 바로 출연 요청에 응해주셔서 촬영을 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숙대에서 ‘3년 연속 강의 우수 교원’에 선정됐다. 2020년 1학기 수업평가에서는 전공 필수 4과목 모두 5.0 만점을 받기도 했다.

“숙면여대생 시켜주세요” 교수님 속삭임에 수십만 조회수
권 교수의 ASMR 영상 조회수는 숙대 유튜브 채널에서 대부분 1000~5000회 수준인 다른 영상과 비교해 압도적이다.

시청자들은 댓글로 ‘숙대는 아닌데 숙면여대생으로 인정해 주시나요. 잠은 잘 자요’ ‘교수님 이거 수업 아니고 ASMR인데 졸지 말고 잘 집중하라는 거 너무하세요’ ‘진짜 교수님이 ASMR 하신다니까 웃긴데 소질 있으셔서 더 웃기다’ 같은 반응을 보이며 즐거워했다.

파이펫을 활용해 ASMR을 하고 있는 권우성 교수. 숙명여대 유튜브 영상 캡처

이씨는 “교수님께서 너무나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ASMR을 잘 소화해 주셔서 첫 영상부터 좋은 퀄리티의 음질을 뽑아낼 수 있었다”며 “덕분에 해당 영상이 큰 인기를 끌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첫 영상이 폭발적 인기를 얻으면서 권 교수는 추가 출연 요청을 받았다. 파이펫, 시린지 등 비전공자는 이름만 들어서는 알기 어려운 전공 관련 소품을 사용한 이 영상은 이날 기준 조회수 24만회를 돌파했다.

권 교수는 “1편이 잘돼서 학교에서 ‘한 편 더 찍을 수 있냐’는 연락이 왔다”며 “이 정도로 인기 있는 콘텐츠인 줄 몰라서 조금 얼떨떨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 후로 경영학부 교수가 주판과 키보드를 활용하거나 법학부 교수가 키보드를 활용해 ASMR을 진행하는 등 ‘교수 ASMR’ 영상이 이어지고 있다.

“교수님 ASMR 덕분에 잘 자게 됐어요” 최고의 찬사
촬영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방음이 잘 되는 공간을 구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팅글의 정석’ 촬영 현장. 숙튜디오 노연주씨 제공

숙튜디오 노연주(20)씨는 “방음이 잘 되지 않는 열악한 환경 탓에 외부 소음을 촬영 현장에서 최대한 줄이고 편집하면서도 이 오디오를 세부적으로 만져가며 편집했다”고 영상 제작 과정을 설명했다.

영상에 대한 반응은 이들에게 큰 힘이다. 이지연씨는 “영상에 재학생뿐 아니라 졸업생 등 많은 분이 찾아와 한 곳에서 서로의 추억을 공유한다”며 “코로나로 대학 생활이 위축되던 시기가 있었는데 이런 친근한 소재로 교수님과 학생이 조금 가까워지는 느낌이 든 것 같아 뿌듯했다”고 말했다.

노씨는 “교수님 ASMR 덕분에 잠을 잘 잘 수 있게 됐다는 반응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

박상희 인턴기자 onlinenews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