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한 성도의 신앙상담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심각한 수준의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는 그는 결혼생활이 두렵고 불안해 하루 빨리 이혼을 하고 싶다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담임목사로서 해줄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서울의 한 대형교회 원로목사의 때늦은 고백이다.
이혼을 입밖에 꺼내기조차 힘들었던 시절을 뒤로하고 요즘은 지상파 방송이나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케이블채널에도 ‘이혼’ ‘돌싱’을 다루는 미디어 콘텐츠가 주를 이룬다. 동시에 교회에선 이혼 등의 아픔을 보듬는 가정회복 사역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고 있다. 이혼자나 이혼자 자녀, 이혼 가정, 이혼 위기 가정 등 이른바 ‘스페셜 패밀리(특별한 가정)’를 대상으로 사역에 힘쓰는 교회와 해외교회 사례 등을 통해 가정회복 사역의 시급성과 필요성을 들여다봤다.
‘이혼 아픔’ 겪은 목회자의 회복사역
주일이었던 지난 3일 경기도 하남 은혜의정원교회(정재우 목사)를 방문해 김은수(가명)씨를 만났다. 2년차 출석교인인 그는 “아들과 남편의 오랜 불화로 아들이 조울증에 시달리고 자살 시도를 하는 등 여러 심각한 상황에 직면한 이혼 위기 가정이었다”면서 “이 교회의 프로그램과 행사에 참여하면서 내가 변화를 경험했다. 타교회에 출석하던 남편도 이를 계기로 이 교회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됐다”고 말했다.
부부의 변화된 모습에 오랜 기간 조울증을 앓던 김씨의 아들도 마음 문을 열었다. 김씨는 “남편과 아들이 10년만에 포옹을 하더라. 우리 가정이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고 이런 사역이 한국교회에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교회 담임인 정재우(67) 목사는 2017년 출석 교인 1000여명 규모의 대조동순복음교회를 정년보다 앞당겨 은퇴하고 은혜의정원교회를 개척했다. 그는 올해로 7년째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교회’라는 슬로건을 걸고 회복 사역에 힘을 쏟고 있다. 그가 새롭게 목회를 시작한 이유는 그 역시 의도치 않게 이혼의 아픔을 경험한 이후, 교회 내 이혼이나 이혼에 준하는 아픔을 겪는 이들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정 목사는 “처음에는 이혼자만을 대상으로 시작했지만 현재는 이혼자는 물론 이혼 위기 가정이나 이혼자·한부모가족 자녀, 우울증 등 마음의 병이 있고 회복을 필요로 하는 이들 모두를 대상으로 초교파적으로 사역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개척 당시를 회고하며 “7년 전 교회를 조기은퇴하고 회복사역을 시작한 이유는 사이즈를 떠나 이런 아픔을 만져주는 채널(창구)이 우리나라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며 “마음의 상처를 끌어안고 사는 것은 사람의 신체로 따지면 찢어진 상처에서 피와 고름이 흐르는데 그 상태로 다니는 것과 같다”며 회복 사역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은혜의정원교회는 현재 80여명의 출석 교인이 있다. 회복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주일 예배는 물론, 소그룹 모임과 영성훈련, 집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참석자들의 영혼을 보듬으며 회복과 신앙성장을 돕고 있다.
정죄보다는 품고 기도하며 회복시켜줘야
서울 온누리교회(이재훈 목사)의 경우 이혼자 회복 프로그램이 유명하다. 교인은 물론 비신자나 타교회 출석 성도도 참여할 정도다.
이혼자, 별거자, 소송 중인 남녀를 대상으로 매년 봄(5월)·가을(10월) 열리는 ‘드림어게인스쿨’은 이혼의 아픔을 겪은 이들이 전문 강사들의 강의와 나눔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 회복을 경험하고 체험하도록 돕는다.
또 드림어게인스쿨이 열리지 않는 기간 동안에는 매주 토요일 ‘DRS 정기예배’를 드려 예배와 조별 나눔 등을 통해 심리상담 효과와 영성훈련까지 겸하고 있다.
올해로 17년 DRS 사역을 맡고 있다고 밝힌 온누리교회 관계자는 4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크리스천 중에서도 이혼의 아픔을 경험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며 “문제는 이들이 아픔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프로그램을 통해 이들이 흔들리는 신앙, 예기치 못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 심리적 압박감에서 벗어나 새로운 소망과 사명을 찾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교회가 이혼의 아픔을 겪은 이들을 정죄하기보다는 이들을 품고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회복시켜줘야한다”고 강조했다.
드림어게인스쿨을 수강한 이병헌(가명)씨는 “내성적인 성격과 낮은 자존감으로 많이 힘들었는데 한주 한주 드림어게인스쿨에 참석할 때마다 나도 몰랐던 아픈 감정과 상처들이 하나하나 느껴졌다”면서 “내 잘못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을 털어놓고나니 와이프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녹고 가슴속 뭉쳐있는 응어리가 하나둘 없어지며 마음의 상처가 많이 회복됨을 느꼈다”고 밝혔다.
'이혼 후 재기' 관대한 미국교회들
미국 플로리다주는 1998년 예비부부뿐 아니라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결혼 전 준비와 결혼 유지에 관한 교육을 필수 과목으로 지정했다. 미국 각 주에서는 이혼자를 위한 치유 프로그램이 시행 중이며 미국 로스앤젤레스 소망교회, 피닉스 마운트파크 코메니티교회, 새들백교회, 윌로크릭교회 등이 이혼자를 대상으로 활발한 사역을 하는 대표 교회로 꼽힌다.
미국 교회는 어릴 때부터 다음세대가 믿음의 가정에 대해 배울 수 있도록 지도하며 교회의 감독과 지도 아래에서 결혼이 이뤄져야 함을 교육한다. 결혼 후에도 이혼을 예방하기 위해 지속적인 교육이 이뤄지는 게 특징이다.
미국교회에서는 가정을 지키기 위한 철저한 회개와 성화 과정의 노력이 있다면 공동체에서 다시 갱신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분위기가 있다. 1980년대에 이혼한 데일 겔로웨이 목사는 사역하던 교회에서 사임하고 이혼 가정을 위한 치유사역을 시작했다. 그래서 세워진 뉴호프 커뮤니티 처치가 ‘미국의 10대 교회’로 꼽히는 뉴호프 커뮤니티 처치다.
고든 맥도날드 목사는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통해 한국 교회에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세계구호선교회(World Relief) 총재인 그는 미국 기독학생회(IVF) 대표, 세계구호선교회(World Relief) 총재를 역임했으며 베델신학교와 고든콘웰신학교 등에서 강의했다.
한창 목회 중이던 1987년 혼외 성관계로 성추문에 휩싸인 뒤 공개적 사과와 회개를 한 뒤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채 3년의 회복 과정을 가졌다. 현재는 마음을 다친 사람들을 위한 사역을 지속하고 있다. 실패의 시간을 전화위복으로 승화한 그는 현재도 강연과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맥도날드 목사는 책 ‘리더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것들을 추구하기 전에 일상적인 삶과 사역 즉 교회 생활에 기본이 되는 것에 충실할 것”을 조언하며 건강한 가정을 세우는 일에 공들여야 할 것을 강조했다.
교회, 전문기관·상담 투트랙으로
한국교회에서 이혼 사역이 저변으로 확대되지 않는 이유는 유교적 토대로 세워진 교회 문화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연약함이나 실패 등의 삶을 드러내는 데 두려워하고 수치심을 느끼는 분위기 때문이다.
한국가정협회장 이희범 목사는 4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낼 경우 자칫 성도들의 가십거리가 되고 판단, 정죄받을 수 있기에 교인들의 교제가 실제로는 친밀하지 못한 경우가 있다”며 “특히 이혼한 이들의 경우 출석 교회를 떠나 대형교회에서 주일예배만 드리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이 회장은 이혼자들도 신앙인으로서 당당하게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돼야 하며 이들을 위한 일대일 상담과 교육, 목회적 돌봄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는 “이혼자에 대해 어떻게 목회적으로 돌봐야 할지 몰라 방치 내지는 말씀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정도에 그치기 쉽다”며 “목회자들은 이혼자들이 이혼의 상처를 딛고 전화위복하고 소망을 주는 목회적 돌봄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개교회에서 여의치 않을 경우 외부의 전문 상담기관에서 회복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20년 가까이 가정사역단체 ‘진새골 사랑의집’에서 이혼자들의 회복을 도운 주수일 이사장은 건강한 가정을 세우기 위한 기초로 교육의 중요성을 십분 강조했다. 주 이사장은 매주일 ‘싱글 크리스찬 비전클럽’을 통해 건강한 만남과 행복한 결혼에 대한 다양한 교육과 교제의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현재 이혼의 아픔을 겪는 이, 사별자, 만혼자 등 10여명이 참여 중이다.
주 이사장은 “홀로된 사람들이 건강한 가정을 꾸리려면 영성 회복만 강조해선 안된다. 이혼 후 대부분 개인 생활도 무너졌기 때문”이라며 “남녀 차이, 성격 유형, 가정을 운영하는 성경적 원리 등에 대해 반드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전했다.
하남=조승현 김아영 기자 cho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