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밀알복지재단과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이 공동 주최한 제10회 스토리텔링 공모전 ‘일상 속의 장애인’에서 입상한 작품입니다. 국민일보 ‘더 미션’은 입상 작품 전체를 매주 월요일마다 소개합니다.
나는 아픈 사람이 아니라서
정민권
고용부문 최우수상(한국장애인고용공단 이사장상)
87! 이젠 숫자 세기도 지친다. 닥치는 대로 면접을 보러 다니는 중이긴 하지만 지금처럼 문을 열자마자 쫓겨나기는 처음이다. 하늘은 시퍼렇고 얼마간 어지러웠다.
청춘은 아프다던데, 시작은 아프지 않았다. 살짝 빛이 났으려나. 공부 머리 대신 운동 신경을 타고난 덕에 죽기 살기로 입시에 매달리지 않았지만 운 좋게 이름 알려진 대학의 체육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유효기간 짧은 운발은 신입생 티를 벗자마자 끝났다. 다이빙 사고로 목이 부러졌다. 경추 3번과 4번, 불완전 사지마비라고 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에크모가 열일을 해야만 숨도 쉴 수 있었다. 가끔 그 애가 농땡이라도 치면 중환자실이 떠나갈 듯 경고음 날렸다. 그러면 재빠른 간호사는 나를 올라탔다. 심장이 터질 듯 갈빗대가 밀려들어오고 나서야 나는 살아났다. 꿈꾸던 체육 선생님은 사치였다. 입시에도 하지 않던 ‘죽기 살기’를 재활하는 데에 쏟아부었다. 그렇게 여름이 다시 돌아왔을 때는 침대에 앉을 수 있었고, 창문 너머 한창 갈색으로 물들 때까지 다시 걸어 보려 애썼다. 마치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포레스트가 된 것처럼 구두 위로 지지대가 연결된 보조기를 허벅지까지 착용하고 걸음마를 새로 배우면서 퇴원했다. 로봇처럼 접히지 않는 무릎 때문에 뻣뻣한 걸음은 어딜 가나 주목받았고 게다가 우리 집은 엘리베이터도 없는 아파트 4층이라서 통원 치료는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엄마에게 부축받으며 간신히 계단을 오르내리면 다리는 후들거리고, 갈빗대가 부서질 정도로 심장이 헐떡였다. 가끔 똥이 밀고 나올 정도였는데 이 어려운 걸 매일 해내야 했다.
하루하루 무기력해졌고 우울해졌다. 매사가 예민해진 말과 태도는 잘 벼른 칼날처럼 날카로워졌고, 그 칼날이 가족들을 향하니 모두 힘들어했다. 하루하루 살얼음판 같던 집안 분위기가 이어지던 어느 날, 폭우라도 오려는지 새벽 내내 통증이 극에 달했다. 잠을 잘 수 없어 뜬 눈으로 천장만 바라보며 고통을 참아내고 있을 때 조용히, 하지만 너무 선명하게 귓속을 파고드는 엄마의 울음소리.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혼자서 일어날 수 없어 소리를 따라가 온 신경을 집중했다. 싱크대와 식탁 사이, 그 좁은 공간일 것이다. 갑자기 몸이 불편해진 아들을 보는 것도 억장이 무너지는 일일 텐데 어떻게든 아들의 비위를 맞춰주려다 속까지 다 타버렸을 엄마는 일기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털이 곧추선다. 나는 다시는 도복을 입고 매트에 설 수도, 땀을 흘리며 달릴 수도 없음을 받아들이고 나자 이젠 미래가 두렵고 어떻게든 회피할 이유를 백만 개쯤 만들고 있었다. 이제 밥벌이는 할 수 있을까? 결혼은? 이런저런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동네를 산책이라도 나갈라치면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없었다. 조금의 안면이라도 있는 사람은 나를 붙잡고 쯧쯧거리며 굳이 안 해도 될 위로를 건네야 직성이 풀렸고, 모르는 사람은 시선을 쉽게 거두지 않았다. 한국판 포레스트 검프가 된 듯했다. 짜증난다고 죽는 사람이 없는 건 인체의 신비에 가깝다. 그때마다 짜증을 참느라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아파트 단지에서 인근 공원까지 누비고 다니면서 보조기는 벗어던졌고 가끔은 혼자 산책할 만큼 용기가 생기자 일해볼 용기도 생겼다.
운동을 다니며 눈여겨보던 컴퓨터 학원을 등록했다. 앉아서 하는 일이라면 몸이 불편해도 해볼 만하지 않을까. 문 열 때 가서 빈 강의실을 돌며 문 닫을 때까지 학원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정보처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어쩐지 프로그래머의 길이 즐겁지 않았다. 그때 학원에서 전시 중이던 컴퓨터 설계 작품을 보고 반했다. 1년 전문 과정을 등록하고 AUTOCAD 공인 자격을 취득해서 건축박람회에 학원 대표로 작품 전시도 하고 건축학과에 다니는 친구의 졸업작품도 도와줬다. 이 작품으로 친구 선배의 설계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게 되면서 실무 능력도 키웠다. 상상한 도면이 화면에 펼쳐지면 흥분됐다. 가능하다면 이 일로 밥벌이를 하고 싶었는데 계획대로 되는 인생이 어디 있던가, 취업 좀 해보려 했더니 IMF가 터졌다. 여기저기 남녀를 가리지 않고 백수가 넘쳐났다. 더군다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발톱에 때만큼도 없던 시대였으니 취업은 하늘에 별 따기였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몸을 쓰는 일도 아니고 컴퓨터를 다루는 일은 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중에 하나가 아닌가. 어느새 90번 넘게 이력서가 거절됐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벼룩시장과 교차로의 구인란을 거르지 않고 뒤적거렸다. 그중 우연히 한 학원의 CAD 강사 구인을 보고 지원했다. 공인 자격증도 있고 설계회사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나름 규모 있던 아파트 상가 설계 경력도 있다. 이 정도면 실무 경험도 있으니 잘 될 것 같았다. 긴장과 흥분이 뒤섞였다. 학원 바로 앞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걸었다. 대충의 이력을 알리자 면접이 드디어 허락되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학원으로 들어섰다.
“어떻게 오셨어요?”
“방금 통화한 사람입니다. 면접 보기로 한…”
“좀 전에 사람 뽑았어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앞서 말한 것처럼 면접에서 떨어졌다. 면접 보러 왔다는 내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들었을 리는 없고 문을 열고 몇 걸음 걷지도 않은 걸음이 문제였을 것이다. 데스크에 앉은 단발머리 여성은 돌아서는 등에 대고 “몸도 아픈 사람이 무슨 강사를 한다고 저래!”라며 낮게 탄식을 섞어 내뱉었다. 아프다니! 난 아프지 않다고, 단지 좀 불편한 것뿐이고 강의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항변이라도 하고 싶었다. 장애인을 모두 아프고 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 취급하는 그 여성의 무례함을 따끔하게 지적하고 싶었지만 어차피 들리지 않을 테니 꾹 참고 돌아섰다.
꿋꿋이 포기하지 않고 여기저기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보냈다. 그러다 당시는 생소하던 애니메이션 제작사에서 연락이 왔다. 기획 PD는 만화 영화를 만드는 일이며 컴퓨터를 잘 다루면 된다면서, 몸 불편한 건 상관없다고 가능하면 오늘 당장 일하자고 했다. 1997년 7월, 그렇게 면접 본 그날 디지털 애니메이터가 나의 첫 직업이 되었다. 일할 수 있는 즐거움은 몇 날 며칠 철야를 해도 몇 달씩 월급이 밀려도 좋았다. 집도, 화장실 가는 것도 아까울 만큼 행복한 시간이었다. 노동자의 인권을 이야기하지도, 직원 복지를 운운하는 시절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몸이 불편한 내 장애는 별반 드러나지 않았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배려나 보호에 특별히 관심 없었다. 나는 장애인이 아니라 그저 함께 작업하는 형이고 오빠이자 동료였을 뿐이다. 그래서 그 시간이 행복했다. 하지만 첫 직장의 달콤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IMF의 여파로 회사는 휘청이다 결국 문을 닫았다. 다행히 당시 애니메이션 업계는 수작업에서 디지털로 전환되는 시기여서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제작사로 옮길 수 있었다. 그렇게 7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하청 작업을 하다 보니 국내 창작물에 대한 갈증이 심했다.
우연히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서 장애인의 자립을 지원하기 위해 창업 보육실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발 빠르게 준비해 애니메이션 제작 스튜디오를 창업했다. 적은 임대료에 비해 황송할 만큼 넓은 사무실과 사무기기, 재무상담까지 지원받았다. 장애인 직원을 고용해서 애니메이션 제작 기술을 가르치고 함께 즐겁게 일했다. 업계가 전반적으로 불황에 허덕이면서 스튜디오는 만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지만 공단 창업 보육실은 장애인이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토대가 되어 준 고마운 곳이었다. 이때의 경험은 다른 일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로 이어졌다. 요즘같이 불경기라면 다시 창업 보육실이 운영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길을 열어 줄 곳이 있다는 든든한 지원이 필요할 때다.
열심히 했지만 잘하지 못했던 스튜디오 폐업 후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디자인 강사를 제안받았다. 애니메이션의 경력과 정보처리, 웹디자인 자격증이 있긴 하지만 강사는 또 다른 이야기라서 잠시 고민은 했지만 체질인지 생각보다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첫 강의는 잊을 수 없다. 제주도의 한 디자인 학원, 부모님과 아내와 친구들까지 모두 반대했지만 이상하게도 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한 달 먼저 해보고 정 못할 거 같으면 그냥 짐을 싸서 오겠다고 설득하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제주도에 첫발을 내딛고 학원장을 만나러 가는 길, 약간의 내리막길에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얼굴이 심하게 쓸렸지만 강의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얼굴의 반쪽을 습윤밴드로 뒤덮고 등장했던 첫 수업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이후 강의하며 보낸 제주살이 3년은 인생을 통틀어 제일 행복한 시간이었다. 딸아이 학교와 이직이 겹쳐 아쉽지만 다시 서울살이를 결정해야 했다. 몇몇의 학원을 옮기며 9년 동안 영혼을 갈아 넣은 강의는 지속됐다. 쉬는 시간마다 책상 위에 선물과 간식이 쌓이는 인기쟁이 강사라는 희한한 경험으로 강의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하루 11시간 강의, 이러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들어 쫓기듯 학원을 떠났다.
요양이 필요할 만큼 몸이 좋지 않았다. 재활 치료 중 워크 투게더를 통해 구직활동을 하다가 장애인복지관으로 이직했다. 직업능력개발훈련교사로 시작해 사회복지학과로 편입해서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사회복지사로 장애인이 긍정적인 삶의 변화되는 길에 함께 한 지 12년이 되었다. 한때는 장애와 비장애를 구분하지 않아서 치열했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편견과 차별로 왜곡된 장애인의 삶을 직면하고 인식을 바꿔보려 애쓰고 있다. 당사자 사회복지사로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의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 강사 자격을 취득해 여러 사업체와 공공기관 등에서 내 경험을 녹여낸 교육으로 공감을 만든다. 또한 장애인식개선 교육을 하면서 늘 아쉽던 장애인 인권을 공부하고자 국가인권위원회 교육을 듣고 인권강사에 위촉되었다. 휠체어 사용자가 불편하기만 했던 화장실이 바뀌고 교육을 듣던 청강생이 고맙다고 손을 잡아 주는 일은 누군가의 일상이 아주 조금은 변화되는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느닷없는 사고로 장애인이 되었지만 든든하게 곁을 지켜준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고, 두렵던 사회생활을 편견과 차별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잘 버텨냈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쉼 없이 일할 수 있던 기회는 내 삶을 바꿔놓았을 테다. 장애인이 주체적으로 삶을 꾸려 나가는 데 있어 직업은 꼭 필요하다. 정해진 직무에 장애인을 맞추기보다 장애인의 역량에 직무를 맞춰보려는 시도가 필요한 시대다. 설계, 애니메이션, 사회복지 등 내가 해왔던 일들은 나만 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니다. 역량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 재밌어하는 일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만약 나를 장애만 보고 거절부터 했다면 내 인생은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오싹해진다.
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