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로 점철된 시대, 오종혁X선예가 뿜어내는 OO의 대서사시

입력 2024-11-04 12:06 수정 2024-11-04 13:22
뮤지컬 '바울과 나'에서 바울 역을 맡은 오종혁(왼쪽)과 아니스타 역을 맡은 선예. 야긴과 보아스 컴퍼니 제공

“내 사명을 다하고 하나님 곁으로 나아가다가 죽는 순간에 비로소 ‘이제야 용서를 받는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오종혁)

“고난도 어느 정도여야 참아질텐데 모든 걸 다 빼앗겼거든요. 용서는 상상도 못할 만큼요. ‘아무런 자격도 없는 내가 용서를 받은 거구나’를 깨닫고 난 뒤에야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마음으로 가능해진 게 용서였던 거예요.”(선예)

최근 서울 강남구의 한 공연장 대기실에서 만난 두 배우에게서는 생의 깊은 질곡 끝에서 길어 올린 참회록 같은 고백이 흘렀다. 고백의 바탕이 된 배역은 바울 그리고 아니스타. 지난 2일부터 무대에 오른 뮤지컬 ‘바울과 나’(연출 이석준)의 두 주인공이다. 국민적 인기를 얻었던 그룹 클릭비와 원더걸스의 메인보컬에서 뮤지컬 배우로서 필모그래피를 쌓아올리고 있는 두 사람이 무대 위에서 ‘용서’의 메시지를 뿜어내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뮤지컬 '바울과 나'에서 바울 역을 맡은 오종혁의 연습 모습. 야긴과 보아스 컴퍼니 제공

반전의 아이콘 바울, 상상 속 아니스타를 만나다
바울은 기독교 역사 상 복음 확장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기독교 박해에 앞장섰던 유대교 신자에서 극적인 회심을 거쳐 선교 여정으로 여생을 바치는 서사가 사도로서의 삶을 보여준다. 스데반을 사랑하는 이방인 여성 아니스타는 성경의 역사적 행간 속에서 작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인물이다.

성경 속 가장 극적인 반전의 아이콘인 바울 역을 소화하는 것은 마치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표현하는 것과 같다. 오종혁은 “1인 2역이라는 접근보다는 ‘사울이 있어야 바울이 있다’는 관점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이 행해왔던 모든 죄와 악함을 되뇌며 낮아졌을 때 비로소 부서질 듯 자기 몸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지만 오롯이 복음 전하는 것에 생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스데반 대제사장 누가 헤롯 등 작품에 등장하는 다른 배역에 비해 창작된 캐릭터인 아니스타는 성경 속 레퍼런스(참고 자료)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선예는 아니스타가 지닌 배역으로서의 특성을 표현의 다양성과 확장성으로 풀어냈다. 그는 “캐릭터가 명확하게 정해져 있는 인물이 아니다보니 같은 대사라도 톤과 방식을 다양하게 바꿔가며 표현해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며 웃었다.
뮤지컬 '바울과 나'에서 아니스타 역을 맡은 선예의 연습 모습. 야긴과 보아스 컴퍼니 제공

분노 무관심으로 점철된 시대에 ‘용서’를 외치다
갈등과 증오, 분노와 복수를 그려내며 대중의 관심을 받는 작품들은 많다. 극의 전개 속 잔혹함이 흥행의 보증수표로 여겨지는 세태도 여전하다. 하지만 복수의 끝이 허무함이 아닌 정의와 의미를 발견하게 하거나 용서를 농도 짙게 표현하는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극중 아니스타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참혹한 현장을 목격하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간 자의 최후가 죽음이라는 사실에 깊은 절망과 분노에 휩싸인다. 이해와 존중보다는 혐오와 배제, 무관심으로 둘러싸인 이 시대 크리스천의 일상도 다르지 않다. ‘바울과 나’가 무대 위에 펼쳐 보이는 용서 화해 자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다. 선예는 “관객 스스로 아니스타를 자신에게 투영해볼 수 있길 바란다”며 비기독교인 관객의 마음에도 새겨지길 바라는 한 가지에 대한 고백을 전했다.

“오디션에서 기적적으로 뽑혔을 때, 연습생 중에 가장 먼저 데뷔를 했을 때, 원더걸스로 엄청난 사랑을 받을 때도 전 잘 알고 있었어요. 내 힘, 내 실력만으로 이뤄낸 게 아니라는 걸요. 비기독교인 관객들이 아니스타를 보면서 ‘저렇게 마음먹을 수 있는 원동력, 저렇게 행동할 수 있는 힘이 뭘까’라고 마음에 호기심을 갖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뮤지컬 '바울과 나'의 공연 현장 모습.

‘레미제라블’ 못지않은 웅장한 무대 주목
뮤지컬 ‘바울과 나’는 개막 전부터 ‘성경으로부터 탄생한 한국판 레미제라블’이란 수식이 붙었다. 작품을 위해 뭉친 아티스트들의 면면을 보면 그 수식이 과언이 아님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드라마 ‘아름다운 그녀’(SBS) ‘고마워 웃게 해줘서’(KBS)의 김효선 작가, 뮤지컬 ‘브람스’ ‘은하철도의 밤’의 이정현 음악감독과 뮤지컬 ‘더 나은 노래’의 정희재 음악감독, 연극 ‘스크루테이프’의 이석준 연출 등이 힘을 합쳤다.

기독 창작뮤지컬로 무대에 올리는 작품인 만큼 준비과정에서 배우들이 경험하는 신앙적 공감대도 남다르다. 오종혁은 “배우들의 소통 창구 중 하나인 단체 채팅방에서 감사 제목을 공유하기도 하고 연습에 앞서 돌아가며 기도하는 날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작품을 위해 모인 이 공동체가 ‘참 좋은 교회’처럼 느껴진다”고 설명했다.

선예는 작품 속 가장 큰 울림을 줬던 곡으로 모든 배우들이 부르는 피날레 합창곡 ‘죽음에서 일어나다’를 꼽았다. 객석에 앉아 보면 그 선택에 공감이 간다. 이 시대를 상처와 아픔을 품은 채 살아가는 이들을 위로하듯 “눈앞에선 폭풍우 불지만 그것이 끝이 아냐”라는 외침이 가슴을 때리기 때문이다. ‘바울과 나’는 다음 달 7일까지 서울 KT&G 상상마당 대치아트홀에서 공연된다.
뮤지컬 '바울과 나'의 공연 현장 모습.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