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가 서울 중구 시청광장을 중심으로 광화문, 서울역, 여의도 등 도심 곳곳에서 진행됐다. 정명호, 정성진, 오정현, 박한수, 김양재, 브라이언 채플 목사 등 저명한 설교자들이 인도와 설교를 맡은 이번 예배 및 기도회는 특별히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동성결혼 합법화에 반대하는 한국교회의 결의를 보여주기 위해 기획됐다. 이날 행사는 미국발 젠더 이데올로기가 정책적 구속력을 갖추고 한국 기독교 교역자들과 신자들의 신앙의 자유를 위협하려는 와중에 우리 사회 전체에, 특히 정치권에 교계의 저항 의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뜻깊은 행사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내용과 위험성에 대해서는 이미 기독교계를 비롯한 사회 각계각층 전문가들이 여러 차례 설명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 굳이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젠더 이데올로기의 철학적 오류에 대해서만큼은 잠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 통상 페미니스트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수행성’(performativity) 이론으로 대표되는 젠더의 철학(the philosophy of gender)은 21세기 젠더 이데올로기의 사상적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버틀러의 철학사상 전체는 현대 실존철학(특히 사르트르로 대표되는 프랑스 실존주의), 데리다로 대표되는 포스트구조주의 해석학, 그리고 보부아르와 이리가레 등으로 대표되는 철학적 페미니즘을 발전적으로 종합한 자유의 사고체계다. 버틀러가 내세우는 자유란 개인의 자유로운 결단과 실천적 ‘수행’(performance)을 통해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결정할 자유를 말한다.
이런 생각은 개별성과 타자성을 삶의 근본조건으로 지목하고 보편화의 굴레로부터 해방되기를 추구하는 현대 실존철학의 급진적 변화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원래 실존철학은 인간이 자신의 성 정체성까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초월적인 자유를 갖는다고 보지 않는다. 20세기 실존철학을 대표하는 하이데거의 현존재(das Dasein, 인간)는 일정 수준의 자유를 가지고 주위세계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존재자인 동시에 궁극적으로 자신의 시간적, 공간적 유한성을 감내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수동적 존재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의 자유를 ‘유한한 자유’라고 말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는 인간의 자유를 감옥 안의 죄수가 누릴 수 있는 자유에 비유했다. 죄수는 감방을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좁은 감방 안 어느 지점에 앉아 있을지 정도는 결정할 수는 있다. 여기서 감방의 벽과 쇠창살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인간의 신체적 자연성과 가사성(可死性, mortality)이다. 인간이 제아무리 자유로운 삶을 살려 해도 자기 신체의 자연적 조건들을 초월해서 살 수는 없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인간의 성(性)은 자율적으로 결정하고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다. 다만 인간은 남성이면 남성, 여성이면 여성으로서 각자에게 부여된 실존적 조건 안에서보다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할 가능성을 가질 뿐이다.
버틀러를 비롯한 젠더 이데올로기 주창자들은 실존철학이 인정했던 이 불가항력적 유한성을 초월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자신의 성에 대해 완벽한 자율성, 전적인 지배력, 공고한 권력을 갖는 기괴한 형태의 위버멘쉬(der bermensch)가 될 것을 강권한다. 이런 초인의 형상에 일반대중은 쉽게 미혹된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죄악과 죽음에 짓눌린 인간, 그리고 실존철학이 가르치는 세계와 죽음에 좌우되는 인간의 모습은 일견하기에 나약하고 염세적인 느낌을 준다. 반면 젠더 이데올로기가 제시하는 자유로운 초월자는 강인하고 희망적인 인간의 형상으로 인식된다. 오늘날의 권리지향적 세태 속에서 양측 중 어느 쪽이 대중에게 더 매력적으로 느껴질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다. 1930년대 히틀러가 독일 국민들의 위버멘쉬였다면, 21세기에는 버틀러가 젠더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대중의 위버멘쉬인 셈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버틀러는 헝가리계 유대인으로 외가 쪽 친척 중 여럿이 홀로코스트에 희생되었는데 막상 그녀의 철학체계는 나치즘과 비슷한 힘의 논리를 추구하고 있다. 중용이 결여된 극과 극은 서로 안 좋은 방향으로 통하는 모양이다.
현재 한국 정치권과 페미니스트, 퀴어문화 지지자 사이에 퍼져 있는 젠더 이데올로기는 버틀러 식 젠더 이론이 통속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버틀러의 이론이 치밀한 학문적 근거를 갖추고 있지만 정치권과 일반대중 사이에 퍼져 있는 젠더 이데올로기는 허술하게 요약된 실천 강령만 남아 있는 교조적 지침에 불과하다. 이론적 근거 자체부터 본래 성과 거리가 먼 데다가 그마저도 치밀한 이론적 근거가 결여된 삶의 강령이 일반대중 사이에 유행처럼 퍼져나가는 것이다. 이런 껍데기에 불과한 사상을 가지고 다원성과 타자성의 윤리를 논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인 동시에 악의적 선동에 다름없다.
이 반지성적 선동의 끝은 어디일까. 젠더 이데올로기를 추종하는 미국 서부 여러 지역의 현 상황을 보면 그 끝을 알 수 있다. 성전환한 남성 운동선수가 여성 선수들과 같은 경기에 참가해 상을 휩쓴다. 성중립 화장실이 일반화되어 있고, 남성이 자신을 여성이라고 주장하기만 하면 스파, 수영장, 헬스장 여성 탈의실에 별다른 제지 없이 출입할 수 있다. 만일 점주나 직원들이 이를 제지하는 경우 차별적 행위라는 이유로 거액의 소송에 휘말리게 된다. 교도소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남성 수감자(성범죄자 포함)가 자신의 성 정체성이 여성이라고 주장하면 여성 교도소에 수감될 수 있다. 부모가 청소년기 자녀의 성전환 수술을 막았다는 이유로 법원에 의해 양육권을 박탈당하는 일 또한 벌어지고 있다. 결국 젠더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이 사상에 동조하거나 그 확산을 방조한 이들조차 이 기괴한 사상 때문에 공정하지 않은 경쟁에 내몰리고 성폭력의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는 셈이다. 이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될 경우 한국에서도 그대로 재현될 일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해 단호한 저항 의지를 표명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다만 그 절차와 방법에 있어서 다소 허술한 면이 있다는 점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대규모 인파를 동원한 도심 광장예배는 우리 한국 기독교계에서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1973년 110만 명에 육박하는 군중이 모인 여의도 광장의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를 시작으로 100만 단위 수의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노천예배나 전도 집회가 과거 여러 차례 개최된 바 있다. 그런데 이런 대규모 노천집회는 원래의 개최 의도가 어떠하든 간에 세간에서 정치적 의미가 있는 행사로 잘못 이해될 소지가 있다. 이는 복음주의 신앙을 추구하는 교회 대다수가 정치적으로 보수정치 진영을 옹호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과거 586세대의 반독재 투쟁 역사와 2010년대 촛불집회의 기억으로 인해 우리 사회에서 대규모 광장집회가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갖는 행사로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이에 자칫 대규모 광장예배가 주최 측의 의도와 달리 우리 사회에 교회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한국교회가 정교분리 원칙을 깨고 스스로 하나의 권력 집단이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질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특히 이번처럼 예배 목적이 특정 법안의 입법을 저지하는 데 있는 경우 오해의 소지는 더욱 커진다. 그리고 신앙을 빙자해서 정치 권력을 획득하려 하는 이들이 이런 대규모 집회를 이용하게 되면 세간의 오해는 더 심각해진다. 실제 전광훈 씨 같은 경우 이번 10월 27일 예배 및 기도회에서 주최 측과 무관하게 예배에 난입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홍보하여 행사를 훼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예배 주최 측은 정치색을 최대한 배제하고 행사를 주관하려 했으나 자격도 없고 초대도 받지 못한 일부 기회주의자들이 예배 및 기도회의 원래 의도를 불순하게 왜곡하는 추태를 보였다.
향후 우리 기독교계가 특정 법안이나 정책을 두고 정부와 국회를 향해 비판과 저항 의사를 밝히려 할 때 굳이 민주화 투쟁을 연상시키는 세 과시용 가두집회를 여는 것이 지혜로운 일인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단발성 이벤트로 그치고 마는 이런 의사표명 방식에 기댈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적으로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한 전문적이고 조직적인 교육을 시행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 보인다. 또한 기독교계 내에 이 일에 헌신할 뜻이 있는 정치인과 오피니언 리더들을 발탁해 정부, 국회, 그리고 언론계에 꾸준히 교회의 통일된 공식적 입장을 밝혀 이것이 실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전략적 접근법 또한 필요하다. 모쪼록 우리 교계가 지혜롭게 단합해서 이론적으로든 실제적으로든 상식과 양심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성범죄 발생 위험성을 크게 높이는 젠더 이데올로기의 정책화를 영구히 막아내는 데 성공하기를 바랄 뿐이다.
◆박욱주 교수는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수학했고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좁은문은혜교회 목사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와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리=김수연 기자 pro111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