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첫 월요일입니다. 이번 주는 날씨를 보면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길목에 접어듭니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날이 있겠다는 예보가 나와 있습니다. 따뜻하게 옷을 입으시되 움츠려 들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11월은 통상 첫눈이 내리는 달이기도 하지요. 기왕 추워진 날씨, 첫눈을 기다리면서 우리 주님의 성탄도 맞을 준비를 해보면 어떨지요.
주님은 이 고통스러운 세상 속에서 우리가 우리의 고통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구원자로 이 땅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으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집이 구원을 얻겠다고 하십니다.
흔히 성경의 황금절로 ‘롬 828’(로마서 8장 28절)을 얘기하는데요. 저는 ‘롬 838’과 ‘839’가 더 좋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고통, 그 어떤 상황, 심지어 죽음에서도 그 사랑을 끊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강력하고 웅장하고 감동적이며 우주적인 사랑의 선포를 들어보세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저 눈물만 납니다. 이번 한 주도 주님의 영원한 사랑 안에 평안히 지내시길 소망합니다.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1740년 11월 4일 찬송가 ‘고요한 바다로’(373장) ‘만세 반석 열리니’(494장)를 작사한 영국의 목회자 어거스터스 몬태규 톱레이디가 태어납니다. 톱레이디 목사는 런던의 웨스트민스터학교와 더블린의 트리니티대학을 졸업하고 1762년 안수를 받았습니다. 1766년 교구 목사가 됐으며 1775년 성공회를 떠나 런던 레스터필즈에 있는 프렌치 칼비니스트처에서 목회했습니다.찬송가 ‘고요한 바다로(If on a quiet sea)’는 영국의 복음잡지 ‘가스펠 매거진’(1772)에 처음 실렸습니다. 이 찬송은 미국을 거쳐 우리나라엔 1908년 ‘찬숑가’ 편찬 때 채택, 번역돼 실렸습니다. 이 찬송은 당시 성도들이 조선이라는 배가 난파돼 국민들이 도탄에 빠졌을 때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1절 후반부) 하고 노래하면서 순풍이 불어오기를 기도했습니다.
당시 성도들은 어려움이 닥치면 또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큰 풍랑 일어나 내 쉬지 못하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2절) 오소운 목사는 ‘21세기 찬송가 해설’에서 “이 풍랑 때문에 더 빨리 갑니다.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까. (침략자) 왜놈들이 들볶을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욱 성장한다는 뜻 아닌가” 하고 해설했습니다.
‘만세 반석 열리니’는 톱레이디 목사가 1776년 작사한 찬송입니다. 천둥과 번개가 치던 어느 날 톱레이디 목사는 석회암으로 된 두 개의 바위가 하늘을 찌르는 바위 틈으로 비를 피해 들어가서 겨우 숨을 돌렸습니다. 그 땅은 그의 영지 끝 블랙돈에 있는 쿰베 버링턴이었습니다. 안정을 되찾은 그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노래합니다.
“만세 반석 열려서, Rock of Ages, cleft for me,
나를 숨겨 주어라. Let me hide myself in Thee.”
이어서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라고 썼습니다. 이 가사는 갈라진 바위 틈에서 주님의 창 자국을 연상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해설에 따르면 그는 ‘인간의 성결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만 가능하다’는 칼뱅주의를 역설한 다음 마지막 결론으로 1절을 실었다고 합니다.
콘스탄스공의회, 개혁자들을 부관참시하다
1414년 11월 5일 서방 대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콘스탄스공의회가 열렸습니다. 공의회는 세 명의 라이벌 교황을 모두 해임하고 보헤미안 개혁가 얀 후스와 프라하의 제롬을 화형에 처하고 재를 모아 호수에 뿌렸습니다. ‘이단’들의 흔적이 일체 남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공의회는 존 위클리프의 가르침 역시 정죄하고 그의 유골을 파내어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그가 남긴 한 줌의 재는 스위프트 강에 뿌려졌습니다. 유럽판 부관참시였습니다.위클리프는 아비뇽 교황청 시대에 살았으며 동서교회의 대분열이 시작될 즈음 사망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교황 및 그의 눈에 보이는 유형적 계급제도가 아니라 미리 구원받도록 택정함을 받은 자들로 이루어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또 당시 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구원에 참여치 못할 유기된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따라 위클리프는 교황마저도 구원을 얻지 못할 자들 가운데 포함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성경은 오직 교회의 소유이며 오직 교회만이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소유한 교회는 모든 택정함을 입은 자들로 이루어진 몸이며 따라서 성경은 바로 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해석되어 그들의 손에 들어가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위클리프의 추종자들은 그가 사망한 후에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던 것입니다. 위클리프는 또 1215년 라테란공의회가 화체설 교리를 선언한 것에 대해 이 교리가 성육신에 나타난 원칙을 부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얀 후스와 프라하의 제롬은 보헤미아에서 가장 유명한 위클리프주의자였습니다. 후스와 제롬이 화형을 당하고 재마저도 없어지자 보헤미안들은 분노했으며 만장일치로 콘스탄스공의회를 부인했습니다. 452명의 귀족들이 모여 자신들은 후스의 신념에 동조한다고 맹세했으며 자격 없는 교황에게는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공의회는 프라하대학의 해산을 명령했고 저항하는 귀족들을 콘스탄스로 소환했으며 보헤미아 국왕이 이단을 지원하고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프라하의 4개조’는 보헤미아 저항운동의 기초가 됐습니다. 4개조 가운데 1조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유스럽게 왕국 전체에 전파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2조는 이종성찬을 거행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니 곧 떡뿐만 아니라 포도주도 평신도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후스가 그의 생애 말기에 도달한 결론으로, 모든 후스파의 주요한 요구 조건이 됐습니다. 3조는 성직자들은 일체의 재산을 포기하고 사도적 가난을 규범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4조는 공적 범죄, 특히 성직 매매를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1315년 11월 6일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가 피렌체 치안 판사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당시 베니스에서 ‘신곡’을 집필 중이던 단테는 정치적 이유로 추방된 피렌체로 돌아가지 않음으로써 형벌을 피했습니다.
노예폐지론자이자 목회자, 흑인 변호하다 살해 당해
1837년 11월 7일 장로교 목사이자 노예제 폐지론자인 일라이자 러브조이가 일리노이주 알턴에서 살해당합니다. 신문 편집자였던 그는 폭도들에 의해 화형당한 흑인을 변호하다가 노예들의 반란을 선동한 혐의로 기소되어 세 차례나 언론사가 파괴되었습니다. 또 다른 폭도들이 창고를 불태우려 하자 러브조이는 창고를 구하려다 총에 맞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노예제 폐지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순교자로 평가받으며 ‘남북 전쟁의 첫 희생자’로 불립니다. 미국의 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에 따르면 그 살인 사건은 나라 전체에 마치 지진이 발생한 듯한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합니다.독일 파시스트, 유대인 공격
1938년 11월 9일 독일 파시스트들이 독일 전역의 거리로 나와 유대인의 집, 병원, 학교, 유대교 회당을 약탈하고 파손하여 거리에 흩어진 깨진 유리 조각을 ‘크리스털나이트’라고 부르는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독일 당국은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1000개 이상의 유대교 회당이 불탔고 7000개의 유대인 사업체가 파괴되거나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망자 수를 계산하기는 어렵지만 일부 역사가들은 이 증오와 폭력의 밤에 수백 명의 유대인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루터의 소년 시절
1483년 11월 10일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독일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납니다. 루터는 소년 시절 행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부모들은 매우 엄격했으며 그가 장성한 후에도 혹독한 처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전 생애를 통해 우울증과 신경불안증에 시달리곤 했는데 일부 학자들은 그 이유를 그의 소년 시절에서 찾습니다. 학교 생활 역시 즐거운 것이 못돼 학교에서 공부시간에 채찍으로 맞곤 했다고 합니다. 이런 경험들은 그의 성격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부친은 그가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으며 이를 위한 교육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루터는 법률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는 22세 때 에르푸르트에 있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들어갑니다. 그는 번개와 폭풍 속에서 죽음과 지옥의 공포에 사로잡혔는데 이때 수도사가 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이런 아들의 결정에 부친은 크게 화를 냈으며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루터를 용서하게 됩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