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월 8일 새벽 5시. 혹한의 날씨는 건장한 남성이 건널 수 있을 정도로 두만강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녀는 북한 초소가 보이지 않는 위치를 발견했다. 곧장 탈북을 시도했다. 목표는 북한으로부터 약 400m 떨어진 중국 땅. 얼마나 멀게 느껴지는지 평소 바라봤던 거리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탈북을 결심하게 된 건 딸이 건넨 한 마디였다.
“나는 학교 졸업하면 곧장 중국에 갈 거야. 엄마 우리 같이 가자. 가본 사람들이 말하는데 저긴 우리나라하고 딴 세상이래. 난 무조건 갈 거야.”
30일 경기도 성남 한 사무실에서 만난 북한이탈주민 허옥희(57) 혜림교회 집사는 딸의 말에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공부를 잘해 수재학교인 1고등중학교에 다니던 딸은 한다면 하는 아이였다”며 “그렇게 고민 끝에 다 같이 북한을 떠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어 “탈북할 때 함께 가면 노출 등으로 위험하니 내가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두 딸을 데리고 오겠다고 했다”고 덧붙였다.
중국에 도착한 허 집사는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방황하다 과거 자신에게 신세를 졌던 동생을 찾아 심양으로 향했다. 식당 일을 소개받아 300위안을 받으며 청소를 시작했다. 하지만 딸의 말과 달리 매일같이 언제 북송될지 모르는 공포에 떨어야 했다. 결국 고심 끝에 동생에게 다시 한번 부탁했다. 북한 여성들을 파는 브로커를 찾아 자신을 팔아달라고.
허 집사는 “그렇게 당시 중국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며 “극진히 대접해준 그에게 마음이 열렸고 아들도 낳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북에 두고 온 딸들이 마음에 걸렸다”며 “이들을 데리고 오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고 덧붙였다.
2009년 다시 한번 동생의 도움으로 한국에 정착했다. 하나원을 나와도 자신을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그러다 한 탈북민 지인으로부터 ‘교회 가면 돈 준다’는 얘길 듣고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마음으로 교회에 출석했다.
허 집사는 “북한은 ‘종교는 아편’이라고 평생을 가르쳤기에 처음엔 곧장 믿기 힘들었다. 눈을 붙이러 교회를 갔었다”면서도 “하지만 어느 순간 정신 차리니 목회자의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등의 말씀들을 듣고 교회에 대한 마음이 점차 열렸다”고 고백했다.
그는 “내 인생의 목표는 가정이었기에 그런 성경이 너무 와 닿았다. 또 현실이 너무 힘들었기에 죽어서 천국에 가고 싶었다는 마음이 커져 혜림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현재 허 집사는 그렇게도 꿈꾸던 가족과 함께 한 집안에서 모여 살고 있다. ‘엄마의 이별방정식’을 펴내며 작가로, 방문요양센터를 운영하며 어른들을 섬기는 사회복지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이 말을 건네며 인터뷰를 마쳤다.
“북한 주민들은 여전히 러시아 파병부터 시작해 북한 정권의 핍박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당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교회가 그들을 기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기도하고, 삶의 의지와 활력이 돼 줬으면 좋겠습니다.”
성남=김동규 기자 k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