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는 권력 쟁취로 이뤄지지 않는다”

입력 2024-10-31 14:30
‘나라 권력 영광’의 저자는 “교회가 국가가 아닌 예수께 충성할 때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사진은 지난 2021년 1월 한 트럼프 지지자가 미국 워싱턴 기념탑 인근에서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복장을 한 채 기도하는 모습. AP뉴시스

복음을 뜻하는 그리스어 ‘유앙겔리온’에서 유래한 표현인 ‘복음주의자’(evangelical)는 애초 개신교도를 가톨릭교도와 구별하기 위해 사용했다. 성경과 회심 등을 강조하는 복음주의는 특히 미국에서 폭발적 성장세를 보여 19세기 초엔 ‘가장 지배적인 신앙 형태’로 자리 잡는다.

종교적 신념을 표현하던 이 단어의 의미는 1980년대 제리 폴웰 목사의 ‘모럴머조리티’(Moral Majority·도덕적 다수) 운동이 급부상하면서 바뀐다. 낙태 반대에 초점을 맞춘 이 운동이 미국 보수층의 열띤 호응을 얻으면서 복음주의자는 점차 ‘보수 기독교인’, 더 나아가 ‘공화당을 지지하는 백인 기독교인’과 동의어가 된다.

문제의 씨앗은 이때부터 잉태됐다. 정치와 신앙을 통합하려는 ‘기독교 민족주의’가 발흥하고 여기에 편승하려는 극우 세력이 교회로 몰려들면서 예배당은 선거 유세장이 됐다. 목사들은 강단에서 정치 구호를 외쳤고 성도들은 정치 성향대로 분열했다. 대선을 며칠 앞둔 미국 복음주의 교회가 마주한 현실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재임 기간인 지난 2017년 9월 백악관에서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다. AP뉴시스

10년간 공화당을 출입한 미국 월간지 ‘디 애틀랜틱’ 정치부 기자이자 목회자 아들인 저자는 이처럼 미국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기 위해 극우 정치와 야합한 복음주의의 민낯을 고발한다. 2019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당선과 공화당의 역사를 분석한 전작 ‘미국의 대학살’을 펴낸 그가 그해 아버지 장례식에서 목도한 일이 계기다.

아버지와 오래 동역한 성도들마저도 “트럼프를 비판한다”는 이유로 애도 대신 조롱을 건네는 데 충격을 받은 저자는 자신이 나고 자란 미국 복음주의의 실제를 4년간 추적한다. 수백여 곳의 교회와 교단, 기독 대학과 비영리단체 등에서 복음주의에 스며든 정치적 극단주의를 예리하게 밝혀낸 그는 이런 결론을 낸다. “미국 복음주의의 위기는 세속적인 정체성에 집착한 데서 비롯됐으며 이는 미국 기독교의 쇠퇴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재임 기간인 지난 2020년 6월 백악관 인근의 유서 깊은 교회인 세인트존스교회 앞에서 성경책을 들어 보이고 있다. 이때 그는 취재진 앞에서 “미국은 위대한 나라”라고 외쳤다. AP뉴시스

저자가 꼽는 ‘미국 복음주의 교회의 총아’는 단연 트럼프 전 대통령이다. 2016년 대선에서 “내가 당선되면 기독교가 힘을 가질 것”이라 장담한 그는 낙태에 반대하는 생명 옹호 성향 대법관을 임명할 것을 약속했다.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트럼프 전 대통령을 다윗과 솔로몬에 빗대며 호응했다. 여러 도덕적 결함이 있던 그를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을 위한 불완전한 도구”로 명명하기 위함이다. 그 결과 미국 복음주의권은 “증오를 선동하고 상대 후보에게 악랄한 인신공격을 퍼부으면서도 단 한 번도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본 적 없는” 정치인과 한배를 탔다.

선택의 결과는 참담했다. 선거 결과에 불복종한 지지자들은 2021년 1월 국회의사당을 습격했다. 인종 갈등, 기후변화 등 공화당 지지자의 입맛에 맞지 않는 설교를 하거나 코로나19 팬데믹 때 온라인 예배를 드리면 ‘좌파 목사’로 낙인찍는 경우도 빈번해졌다.

교회가 정치에 잠식되면서 기독교에 대한 대중의 신뢰도도 급격히 하락했다. 1975년 갤럽 조사에서 미국인 3분의 2가 “교회를 대단히 신뢰한다”고 답했지만 트럼프 행정부 임기 말엔 36%만 그렇다고 답했다. 낙태 반대 운동에서도 패배했다는 게 저자의 견해다. “정치적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먼저 공공의 논쟁에서 승리해야 하는데 낙태 반대 진영은 비일관적 입장으로 이 논쟁에서 패했다”는 것이다. 낙태 반대 근거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난민 포용과 어린이 사망 원인 1위인 학교 총격 사건 등에도 동일하게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의미다.


정치계와 교계의 주요 기관과 인물을 촘촘히 취재해 완성한 노작(勞作)이다. 국내 상황과 겹치는 지점도 꽤 돼 반면교사 삼을 대안도 여럿이다. “나쁜 종교를 해독하는 최고의 해독제는 좋은 종교”라는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의 말을 인용한 저자는 마음과 목숨, 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이 곧 “낙태와 그 밖의 중요 문제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결국 국가가 아닌 예수께 충성할 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