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 교회사] 루터는 왜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城)교회에 붙였을까

입력 2024-10-28 05:45 수정 2024-10-28 10:38
안녕하세요. 더미션입니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습니다. 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속에는 개신교가 시작된 근원이 되는 날이 있습니다. 바로 종교개혁일입니다. 어제는 종교개혁 주일이었지요.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돼야 한다’는 개혁 교회의 표어를 상기합니다.

루터는 1517년 만성절 전날인 핼러윈 데이(10월 31일)에 면죄부 판매를 지적하는 95개조 논제를 붙였습니다. 토론을 위해 게시했는데 들불처럼 그 내용이 퍼지면서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얻었고 이후 교회 개혁의 구심점이 됐지요.
영화 <루터>에서.

무엇보다 개혁은 나로부터 개혁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매일 매일 오직 말씀에 비춰 살아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예수 중심’의 인식도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번 한 주는 루터나 칼뱅 같은 종교개혁가들의 생애나 사상을 담은 책 한 권을 선택해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평안한 한 주 되십시오!


312년 10월 28일 전통에 따르면 이날 32세의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밀비안 다리에서 막센티우스를 물리쳤습니다. 콘스탄티누스를 알았던 기독교 역사가들에 따르면 그는 전투 전날 저녁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꿈속에서 기독교의 상징을 병사들의 방패에 부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합니다. 초기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이 표징으로 정복하리라”는 단어들과 함께 공중에 환상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병사들의 방패와 군기에 그리스어로 chi와 rho를 겹쳐 쓴 것처럼 보이는 문장을 그려놓도록 했습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Christ)’의 첫 두 문자였다고 합니다.

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이 순간을 가리켜 콘스탄티누스가 회심했던 순간으로 부르지만 역사가들은 이후에도 콘스탄티누스는 계속 태양신을 섬겼다고 합니다. 따라서 실제로 콘스탄티누스의 회심은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진 과정이라는 게 정설입니다. 어쨌든 그는 로마제국 최초의 기독교인 황제로 여겨집니다. 밀비안 다리에서의 승리 이후 그는 이듬해인 313년 밀라노에서 리키니우스와 동맹을 맺고 기독교인에 대한 탄압 중지, 그들의 교회와 묘지, 재산을 다시 돌려줄 것 등의 내용으로 협정을 맺었습니다.


1949년 10월 28일 대학생이었던 짐 엘리엇이 자신의 일기에 가장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영원한 것을 얻고자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what he cannot lose).”

그로부터 7년 후 엘리엇은 에콰도르 아우카족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사로 나갔고 아우카족이 사는 정글에 들어갔다가 그들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남편의 생애를 담은 ‘전능자의 그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은 짐 엘리엇의 신조 앞부분에 담긴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영원한 것을 얻고자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

1562년 10월 29일 킹제임스성경의 복음서와 사도행전, 요한계시록을 번역한 조지 애벗이 태어납니다. 1611년 그는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었지만 1621년 사냥 사고로 한 남성을 살해한 후 그의 인기와 건강이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1837년 10월 29일 네덜란드의 신학자이자 정치가인 아브라함 카이퍼가 로테르담에서 태어났습니다. 1907년 10월 29일 온 나라가 그의 70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지난 40년간 교회 국가 사회 언론 학교 과학 분야에서 네덜란드의 역사는 거의 모든 페이지에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는 쓸 수 없다”고 선언할 정도로 그는 큰 인기와 명성을 얻게 됩니다.

1883년 10월 30일 근본주의의 가장 유명한 전도자 중 한 명이자 미국 밥존스대학교의 설립자인 밥 존스 시니어가 태어납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 성(城)교회 문에 95개조 논제를 못 박았습니다. 루터가 95개 논제를 작성한 이유는 당시 로마 가톨릭 교황 레오 10세가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했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이의 부당함을 지적하기 위해 논제를 작성했습니다. 면죄부 자체의 옳고 그름을 넘어 그 배후에 이는 착취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논제를 붙여 놓고 토론을 해볼 셈이었습니다.
독일 비텐베르크 성(城)교회 전경.

논제에서는 ‘교황에게 영혼들을 연옥에서 해방할 힘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이러한 힘을 예배당의 건축과 같은 하잘것없는 이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사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제 82조). 또 교황은 이 면죄부 판매자들로부터 마지막 한 푼까지 착취 받고 있는 가난한 자들에게 오히려 구제금을 베풀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만약 이를 위해 성 베드로 성당을 팔아야 한다 해도 이는 교황으로서의 마땅한 임무라고 했습니다(제 51조).
독일 비텐베르크 성교회 정문에 새겨진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루터는 그런데 왜 비텐베르크 성교회에 자신의 항의문을 붙였을까요. 당시 가톨릭교회 가운데는 면죄를 베푸는 특권을 교황들에게서 위임받은 곳이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비텐베르크 성교회는 모든 죄를 완전히 사면하는 아주 예외적인 특권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이 고백의 날로 선정된 날은 11월 1일이었습니다. 이날은 만성절(萬聖節·All Saints Day)로서 성인들의 공로가 곧 면죄의 바탕이었으며 그들의 유골과 유품이 이날 전시되었습니다. 작센의 선제후 현인 프리드리히는 소박한 믿음을 가진 인물로 비텐베르크를 성보의 한 저장소라 여기며 독일의 로마로 만드는 데 힘썼습니다. 그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수많은 성물을 수집했습니다. 프리드리히가 모은 보물은 1509년까지 5005개였다고 하는데요. 이 조각들에 딸린 면죄 연한은 연옥 생활을 1443년 감해줄 수 있는 것으로 계산되었다고 합니다. 루터는 1516년 세 번의 설교를 통해 이 같은 면죄 행태를 비판했고 마지막은 만성절 전야인 핼러윈에 행해졌습니다.


1992년 10월 3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633년 지구가 아닌 태양을 우주의 중심으로 믿었다는 이유로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정죄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오류를 공식적으로 인정합니다.

1533년 11월 2일 가톨릭 당국의 괴롭힘을 받은 장 칼뱅이 침대보 밧줄을 창문으로 내리고 농부로 변장해 파리를 탈출하고 어깨에 괭이를 메고 갑니다. 그는 제네바에 정착하기 전에 3년 동안 도망자로 지냈습니다.

1600년 11월 3일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고전인 ‘교회 정치법(Laws of Ecclesiastical Polity)’이라는 책을 쓴 성공회 목사 리처드 후커가 영국에서 사망했습니다. ‘교회정치법’은 청교도와 로마 가톨릭에 대해 영국성공회를 옹호한 책입니다. 후커는 책에서 국가의 권력이 교회 안에서 정당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교회의 전통과 이성이 성서와 더불어 신앙의 기준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